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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었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여·야의 모든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어떤 “은퇴” 정치인은 자신의 반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고 비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청와대도 슬픔에 잠겼다고 들었습니다. 가게를 지키고 앉았던 사람들도, 길을 가던 사람들도 모두 슬픔을 금치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라의 임금님이, 예컨대 고종황제께서 붕어하셨을 때에도, 그 시대에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백성이 이렇게까지 슬퍼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장군이 현직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생각이 부족한 어느 한 측근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궁정동의 그 때 그 참사는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이기는 했지만 오늘과 같은 광경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모든 언론매체가 왜 이렇게도 야단법석입니까. 노무현 씨가 산에서 투신자살했기 때문입니까. 그러나 설마 국민에게 자살을 미화시키거나 권장하는 뜻은 아니겠지요. 내가 4월에 띠운 홈페이지 어느 칼럼에서 “노무현 씨는 감옥에 가거나 자살을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하여 이 노인을 매도하며, 마치 내가 노 씨 자살의 방조자인 것처럼 죽이고 싶어 하는 “노사모님들”의 거센 항의의 글이 쇄도하여 나의 홈페이지는 한참 다운이 되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나는 내 글을 써서 매일 올리기만 하지 내 글에 대한 댓글이 천이건 만이건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하도 험하게들 나오니까 내 주변의 가까운 이들은 “테러를 당할 우려가 있으니 혼자서는 절대 집을 나가지 말고, 밤에는 더욱이 외출 하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에 내 대답은 한결 같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늙어서 반드시 요를 깔고 누워서 앓다가 죽어야 한다는 법이 있나. 테러 맞아 죽으면 영광이지.” 아직은 단 한 번도 테러를 맞은 일이 없지만 앞으로도 마땅히 내가 해야 할 말을 하다가 폭도들의 손에 매 맞아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위기에 처해도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이가 몇인데요. 여든 둘입니다. 사법부는 노 씨에 대한 모든 수사는 이것으로 종결한다고 하니 이건 또 어찌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어렵게 된 검찰의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려는 속셈입니까. 이 나라에는 법은 없고, 있는 것은 감정과 동정뿐입니까. “검찰이 노무현을 잡았다.” – 이렇게 몰고 가고 싶은 자들이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 노무현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뿐입니다.
이 비극의 책임은 노 씨 자신에게 있습니다.
김동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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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은 韓나라(조선반도에서 살아 온 韓族의 땅)의 역사에서 영원히 기록될 날일 것 같다. 王 같은 대통령 – 제왕적 대통령 – 즉 ‘王’의 ‘先王’이 自殺한 날이기 때문이다.
세계역사상 권력자가 自殺한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 1889 – 1945)는 패전을 눈앞에 두고 自殺했다. 근 8,000萬 명의 희생자를 낸 인류역사의 최대 비극이었던 世界제2차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오늘 前 대통령 盧武鉉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의 治政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필자도 死者의 죽음을 충심으로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
그는 죽으면서 大人다운 면을 유서로 남겼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과연 비범한 死生觀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존경을 받을만하다.
그는 “火葬해라”고 했다. 케케묵은 國家主義 숭배 전통을 버리지 못하는 한국에서 권력의 정상을 누렸던 者가 그렇게 유언을 남긴 것은 참으로 갸륵하다. 중국의 鄧小平에 못지않은 귀감이다.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랜 된 생각이다”는 그의 유언과 더불어 볼 때 그가 家族葬을 원한 것은 분명하다. 과연 그의 평민(the people)다운 면모이었고 한국의 어린民主主義가 무럭무럭 자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무시하지 말아야 그가 천당으로 간다.
한국의 언론은 그의 죽음을 거의 일제히 ‘逝去(서거)’라고 일컫는다. 본란을 포함하여 개중에는 ‘自殺’로 표현한다. 그가 죽은 후 몇 시간 동안은 언론에서 ‘死亡’이 우세하더니 그 후로는 ‘逝去’가 거의 일색이 되었다. 어느 것이 맞나?
무릇 언론의 사명은 사실(facts)의 전달이다. 그렇다면 ‘死亡’이 맞다. 산 사람이 생명을 잃을 때 일컫는 일반적 중립적 어휘(generic, neutral term)는 漢字語 韓語로 ‘死亡’이고 토착어 韓語로 ‘죽음’이다. 사망의 원인과 형태를 더 자세히 보도하자면 ‘自殺’일 수도 있고 ‘被殺’일 수도 있다. 가급적이면 더 자세히 보도해야 할 직업언론의 과업으로 볼 때 이번 경우에는 당연히 ‘自殺’이다.
尊待語가 무성한 韓語에서 ‘逝去’는 죽음을 높이는 말이다. 現職이거나 前職이거나 대통령과 같은 지고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그냥 죽어도 逝去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현직에서 물러난 者가 검찰에 출두하여 賂物 수수로 조사를 받고 起訴 당하기 거의 직전에 自決한 것을 두고 ‘逝去‘라고 하면 民主主義에서는 말이 안 된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殉國하거나 나라를 위해 전선에서 싸우다가 戰死하거나 火災를 진압하던 중에 殉職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형사 피의자의 죽음을 逝去로 취급하는 것은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해야할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상식의 세계를 뛰어 넘은 문명 이전의 상태에서나 가능할 법이다.
盧 전 대통령의 죽음을 ‘逝去’로 추앙하는 것은 한국의 얄궂은 정치 내막을 투영하는 것 같다. 그의 죽음을 따라 일어날지도 모를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과 그의 죽음을 악용하려는 의도가 복합적으로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다 한글專用에 따라 韓語가 문란해지는 가운데 文化的 自殺로 가고 있는 오늘날의 잘못된 풍조가 한몫 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盧 전 대통령의 自殺을 ‘逝去’라고 해야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 직업언론이든 자유언론(a free press)이든 – 언론이 眞實을 추구하며 正道로 가야 발전한다.言論이 言語를 왜곡하고 거짓(falsehood)을 조장하면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 권력을 쥔 者는 歪曲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한국의 검찰이 잠재적 ‘國家暴力’의 化身으로 남아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그들이 聖賢과 天使들의 집단이 아닌 이상 왜곡의 충동을 물리치지 못한다. 그들에 의한 眞實의 왜곡을 감시해야 할 언론이 진실로 正道로 가지 않으면 韓나라에서 거짓을 추방하지 못한다.
지금은 死者의 유언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할 때이고 한국의 어린民主主義가 발전하는데 유익한 기회로 활용해야 할 때이다.
이장춘 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