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바로알기 ***

  • #101529
    사시미 98.***.56.229 2321

    오유석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 연구교수)

    � 권력형 부정비리

    1. 부정축재처리의 역사적 실패

    4・19 혁명으로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했던 죄명으로 쇠고랑을 찼던 기업인들은 5・16으로 회생되었다.

    ▲5.16 군사혁명 박정희

    원래 군사혁명정부의 부정축재 처리는 초강경했다. 혁명 발발 12일만인 1961년 5월 28일 당대 재계를 주름잡던 재벌 총수들이 수갑에 묶인 채 혁명군에 연행되었다. 당시 동경에 머물고 있던 이병철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고회의는 29일 이들의 구속을 발표하면서 부정축재처리요강을 공포하고 그에 따른 부정축재 처리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처리위원회는 부당이득은 모조리 환수한다고 강경 발표했다. 수사는 급진전 되었고 중간발표때 마다 축재액은 늘어났다. 7월 21일 5차 중간발표 때는 726억환에 달했다. 초창기 부정축재 처리의 중점은 거물 재벌의 재산 몰수 있었다. 6월 19일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이병철씨는 최고회의 의장 앞으로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뜻을 6월 25일 이정림, 최태섭, 설경동, 조성철, 남궁련 등 7명은 공동명의로 전 재산의 국가헌납의 결의문을 보내왔다.

    이병철은 6월 26일 밤 김포공항에 내리는 길로 모 호텔에 연행되었는데 3일 후인 29일 오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공식으로 밝혔다.

    6월 30일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조사을 일단락 짓고 구속자를 모두 석방했다. 석방되기 직전 박정희장군은 이들과 직접 만나, 재계인사들에게 하루속히 기간산업 건설계획에 참여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어떤 모종의 야합이 있었는지 이주일 처리위원장의 “.. 산업재건에 이바지할 기회를 제공키로 했다”는 매우 강도 낮은 특별담화가 있었다. 그리고 1961년 12월 30일 최종 통고된 부정축재 환수액은 42억 2천800만환으로 반감되었다. 부패와 구악일소의 한 본보기로 서슬 퍼렇게 시작된 부정축재자에 대한 단죄는 이렇게 6개월도 못돼 경제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절대 절명의 혁명정부의 요청에 따라 정부와 재벌의 밀월(유착)의 막을 여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석방된 인사들은 그 길로 경제재건촉진회(한국경제인협회의 전신)를 구성하고 기간산업건설안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제시하고 부정축재 환수금의 환수기일 연기와 공장건설 후 주식으로 납부하는 방안을 건의했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재계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군정이 마련한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주요사업을 떠맡은 부정축재자의 공장건설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도리어 정부는 이들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외자도입, 공업단지조성, 내자지원 등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단지 경제개발게획에 참여한다는 명목으로 부정축재자들은 더욱 비대해 졌다. 또 다시 국민들로부터 기업윤리와 특혜시비로 지탄받는 기업풍토가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2. 사카린 밀수 사건

    1966년 9월 22일 삼성재벌 총수 이병철씨는 한국비료공업(주) 헌납 성명을 발표했다.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당시 건설 중이던 삼성재벌 계열의 한국비료가 건설자재를 가장하여 사카린의 원료인 OTSA 60톤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여 그 중 38톤을 금북화학에 내다 팔았다는 내용이다. 언론은 서슴없이 강경하게 이 사건을 밀어 부쳤다.

    “생산이 있기 전에 무역이 있었고 무역이 있기 전에 밀수를 했다. 이것이 한국 재벌 생성의 과거사인줄 알았던 국민들은 지금도 공장을 짓는다고 밀수를 하고 수출을 한다고 밀수를 하는 재벌의 현실에 이제 대경실색의 상태를 지나 용솟음치는 분노를 억누르는데 온갖 이성을 앞세우고 있다…..“

    파문이 번져가자 정부도 사건의 경위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박대통령까지 개입, 전면수사를 지시했고 이에 따라 사카린밀수사건 전담 수사반이 구성되었다. 사건이 호가대되자 이병철 회장이 한국비료헌납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건은 확대되어 정부고위관계자들이 수사반의 조사를 받는 가하면 한국비료의 핵심인물들이 구속 또는 불구속 되었다. 다만 이회장이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곧 정계로 확대되었다. 검찰수사결과에 대해 민중당은 박대통령에게 경고 성명을 발표하는 가하면 이러한 파동의 회오리 속에서 김두한 의원의 오물투척사건(국회에 출석한 국무위원석에 분뇨를 뿌려 부패정권을 규탄한 사건), 국무위원 총사퇴결의안 제출 등 정치적 사건이 꼬리를 물었고 장준하 의원은 규탄궐기 대회에서 박대통령을 심하게 몰아붙여 국가원수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기까지 했다.
    사카린사건이 밀수냐 수입이냐에 대한 공식적인 결론은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지만 1963년 3분(三粉)폭리(설탕, 밀가루, 시멘트)사건과 함께 그것이 누군가 상당히 부당하고 부정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굶주림에 허덕이던 국민을 담보로 일어났던 일인만큼 최고 권력자와 무관할 수 없다.

    3. 4대 의혹사건과 정치자금

    최고회의는 그 직속에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된 국내정보사항 및 범죄 수사 활동을 감독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중앙정보부를 설치하는 내용의 중앙정보부 법을 공포하였다.(1961년 6월 10일) 군사정권은 중앙정보부를 가징 핵심적인 권력 장치로 삼아 우선 이를 통해 공무원의 심사에 착수, 관료체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내부지배를 공고히 했다. 그리고 정보부조직을 근간으로 민주공화당을 창당, 여기에 지식인, 관료를 흡수한 민주공화당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조직기구를 가진 정당으로 부상했다.

    새로이 구성될 민정을 장악하고 그 선거과정에서 경쟁상대인 구 민간정치인을 정치정화법으로 묶어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일부는 포섭하는 분열통치의 수법을 악용하여 정치권에 불신의 벽을 쌓았다.
    이와 함께 군사정권은 자금원을 확보하기 위해 통화개혁, 통화증발등의 경제 조치를 단행하여 반대세력의 자금을 실질적으로 감소, 고갈시키고 국내 시장조작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확보했다. 이른바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찡고 사건, 워커힐 사건, 증권파동 등의 4대 의혹사건이 그것이다.

    1) 새나라 자동차 사건 : 중앙정보부(부장:김종필)가 일본으로부터 1,642대의 닷산 승용차를 면세(자동차의 정상적인 관세는 110%)로 수입하여 ‘새나라’란 이름으로 수입가의 두 배로 판매한 사건이다.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62년 불루버드란 이름으로 도입된 날씬한 승용차가 서울 거리에 나타났다. 이 불루버드 400대가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시발택시를 몰아냈다. 외국인 관광용 150대, 일반관광용 250대 모두 관광용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물론 관세도 물지 않는 특혜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들 관광차는 곧 일반택시로 모습이 바뀌었고 3-40만원 하던 시발차는 6-7만 원 선으로 폭락 그때 까지 한국 자동차산업을 이끌어 오던 시발자동차의 도산을 강요했다. 블루버드의 바퀴자국은 의혹으로 차게 되었다. 새나라자동차는 이어 조립용 부품 1,721대분을 들여와 국내에서 조립 판매하여 단번에 국내 승용차 시장을 휩쓸어 버렸다.

    1962년 1월 29일 새나라자동차가 설립되었다. 김종필과 재일교포 실업인으로 알려진 박노정씨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이 자동차 공장은 4대의혹사건의 호가대, 김종필의 출국 등으로 63년 1월부터 공장이 문을 닫았다.

    2) 워커힐사건 : 혁명주체였던 K씨는 외화획득의 일환으로 관광사업을 착안, 동양최대의 관광지로 워커힐을 건설키로 했다. 소요자금 65억환(화폐개혁 후 6억5천만원). 정부와 정부관리기업체의 출자와 정부보증으로 시중은행에서 대출받아 건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워커힐의 모습이 갖추어져 가면서 의혹의 골짜기는 깊어갔다. 외화부족으로 경제위기가 감도는 판에 무슨 돈으로 외국자재를 들어오는가, 공사자금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고 있다는데.등등. 의혹은 사실로 들어 났다. 소장과 과장이 공사자금을 부정 유용했고 보관중인 입찰보증금이 행방불명되었다. 워커힐 자재중 일부가 공화당 보수를 위해 빠져나갔고 시공어자와 발주자 사이에 뇌물이 오갔다. 이 워커힐인 63년 4월 8일 개관되었는데 그날 자금 유용과 수뢰관련자들이 모두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주한미군의 돈을 노렸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다. 빠나 도박장, 댄스홀 등 유흥장이 폐쇄된 까닭에 마땅히 한국에서 휴가를 보낼 곳이 없는 미군들을 대상으로 건설이 계획되었고 여기서 얻어지는 이득은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미국언론(The New York Times)에 보도되자 미군당국은 워커힐을 출입금지 시켰고 이에 따라 막대한 재정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3) 빠찡꼬 : 의혹은 꼬리를 물었다. 새나라자동차사건이 한창일 무렵 돌연 임시국무회의에서 회전당구대(빠찡꼬) 시설의 폐지조치가 의결되었다. 회전당구는 5・16 이전 이미 도입되었던 것이나 그 후 혁명정부가 금수품목으로 막아놓고도 재일교포의 재산반입 명목으로 880대를 면세로 수입허가한데서 의혹이 비롯되었다. 더구나 정부가 3개월 시한부로 전업기간을 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게 되니 기존 34개 업소는 8,000만원의 시설비와 선불세금의 피해를 입었다.

    4) 증권 파동 : 증권 파동의 주역과 주변인물들이 공식적으로 확인 된 것은 파동이 일어난 10개월 뒤 그러니까 김종필, 김용순 씨의 뒤를 이어 김재춘부장이 취임한 후 정보부 수사를 통해 그 전모가 드러났다. 이 사건은 혁명정부가 공화당 사전조직의 자금 조달을 위한 방편으로 이권과 결탁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해 보자는 의도로 구상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때의 증권 파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거지가 되고 또 많은 사람들이 패가망신되었다.

    세칭 4대의혹사건 뿐 아니라 재일교포 재산반입사건을 포함 군부지도자들 사이에 터져 나온 각종 의혹사건들은 공화당 사전 조직과 관련된 것으로써 구악을 일소시키겠다던 혁명정부가 구세대보다 깨끗할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 스위스 비밀은행의 정치자금

    1960년대 대통령비서실장, 1970년대 초반 중정부장 이후락씨는 1980년 봄 유명한 ‘떡고물’ 이라는 발언을 했다. 정치자금은 그 조성과정이나 용도도 문제이지만 더 뒷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조성자의 손에 들어가는 ‘떡고물’ 때문이다. 이후락씨는 정치자금조성에 깊이 관여했고 국내외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교통정리하고 ‘검은돈’을 주물렀다.
    대미로비사건으로(박동선 사건) 한미관계가 한계상황으로 치닫던 70년대 후반 미의회국제(한미)관계 소위보고서(이하 소위)에도 이후락은 가장 빈번한 논의 대상이었다.

    이후락(중정부장): 스위스에 비밀정치자금을 예치하고 관리함
    김성곤(국회의원, 기업가) 수표로 지불되는 정치자금을 수집
    김형욱(중정부장): 수표를 현금화하고 현금으로 지불되는 정치자금을 수집(소위 보고서 346쪽)

    정치자금원으로서의 이후락의 역할과 스위스은행 비밀계좌는 이후락의 아들 이동훈의 소위 증언에 의해 상세히 호가인댔다.
    이동훈은 소위에서 “ 스위스 은행자금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용하기 위한 ‘정부자금’이었다”고 진술했다.(청와대 고위 측근들에 의해서도 비밀계좌 존재는 확인됐다) 그러나 물론 그 자금이 대통령의 사적(私的)인 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쫒아낸 야당지도자 및 자신의 지지자들을 위해, 그리고 군(軍)의 충성을 보증받기 위해 다시말해서 자신의 장기 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했다.

    소위보고서에서는 박정권이 1971년 4・27 대선자금 600-700억원 (그해 예산 5,242억원의 10%가 넘는 액수)에 미국의 기업들도 한몫 거들었음이 드러났다. 석유사인 걸프는 선거자금 1000만덜러 요청을 받고 300만달러를 냈다. 걸프는 1967년 대선때에도 100만 달러를 현금으로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넣어 달라는 이후락 비서실장의 요청에 따라 정치자금을 냈다.(걸프사 극동조정관 허버트 굿멘의 1975년 소위 증언). 그 대신 걸프는 헌금의 대가로 유공과 손잡고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1971년 칼텍스 석유사들도 정치자금 100만 달러를 스위스은행에 넣었다. 이 돈들이 모두 공화당 정부로 들어 간 것으로 보고서는 판단하고 있다. 이 무렵 총기 메이커 콜트도 경호실장 박종규 측으로부터 1971년 선거자금 헌납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지하철 전동차메이커 미쓰비시 등도 1971년 120만 달러를 미은행계좌로 이전시켜 정치자금을 낸 사실이 밝혀졌다. 서울 지하철개통(1974년 8월 15일) 이전부터 지하철도입을 두고 정치자금 커넥션이 있었던 것이다.(최근 고속철도를 둘러싼 검은돈과 정치자금의 커넥션과 마찬가지로)

    5. 조선일보와 코리아나 호텔

    박정권은 언론에게 각종 특혜를 베풀어 언론이 제 사명을 잊고 오직 상업적 성장에 몰두하게 유도했다. 1967년 당시 일반 자금의 대출금리가 25%였을 때 신문들은 18%의 낮은 금리로 대출특혜를 받았으며 신문용지에 대한 수입관세에서도 신문들은 일반 수입관세 30% 대신에 4.5%의 관세율을 적용받았으며 저리의 차관도입이라는 특혜까지 누렸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1968년 박정권이 베푼 특혜에 힘입어 신문사 건물과 코리아나 호텔을 짓기 위해 7-8%에 불과한 4천만불의 일본 상업차관을 들여왔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겠는가? 조선일보는 3선을 향한 박정희의 정치야욕에 편승하여 대대적인 3선개헌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캠페인에 앞장섰다.

    이렇게 차관 특혜를 받아 시작한 코리아나호텔은 1972년 완공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외국 관광객이 적어 객실이 텅텅 빌 수밖에 없었다. 조선일보는 여기서 또 정부에 압력을 넣어 자구책을 마련했다. 당시 본점 신축을 추진중이던 주택은행의 계획을 취소하고 코리아나 호텔에 입주시킨 것이다. 대지에 대한 지분이 전혀 없이 건물만 주택은행에 매각한 어처구이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특혜의 대가로 조선일보는 언론이기를 포기하고 유신찬양에 광적으로 매달렸다. 역사의 기록을 위해 조선일보의 유신찬양이 과연 어느정도였는지 그 광신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앞으로의 보다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 진정 알맞은 조치”라고 했다. 또 “헌법 기능의 일부 정지와 아울러 이에 따르는 몇가지 조치가 선포된 것은 새로운 헌정 질서의 존립을 위하여 만부득한 조치”라고 했으며 “ 비상사태는 민주제도의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하나의 탈각이요 시련이요 진보의 표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조선일보 1972년 10월 28일자,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 중에서)

    � 도덕성문제 : 문란했던 박정희의 여성편력, 도덕적 이중성

    최고 권력자는 실제 모습과 관계없이 온갖 포장을 둘러쓴 채 만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소탈하고 서민적이고 검소함에 대한 박정희에 대한 신화는 그러한 포장이 빚어낸 결과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여론의 사정권을 벗어나게 되면, 국민의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숱한 곳에서 인간 박정희의 모습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궁정도 안가일 것이다.

    1. 3공의 요화 정인숙 사건

    본명 정금지(鄭金枝), 자유당 시절 대구부시장을 지낸 공직자의 딸. 대구 신명여고 졸업 후 문리사대(명지대) 중퇴.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정인숙은 오빠 정종욱의 총에 맞아 한강변에서 숨졌다. 당시 정인숙의 수첩에 기록된 전현직 고관 및 재계인사는 20여명이 넘었고 정인숙이 남긴 3살박이 사내애가 대통령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았다. 이 사건은 결국 김계원 중앙정보부 부장이 직접 나서기 까지 하여 사건을 무마하였지만 당시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유행가의 가사가 바뀌어 ‘박의 소생’이라는 노래로 퍼질 만큼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 육영수 여사는 어디서인지 변조된 가사 전문을 입수, 박대통령에게 들이대며 따졌다고 한다.(김정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

    2. 궁정동 안가

    이렇게 사건화 된 여인관계 말고도 박정희 대통령의 여자관계는 매우 복잡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대통령의 사생활을 관리한 박선호(예비역대령, 중정 의전과장)는 10・26으로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린 80년 1월 25일 육군고등군법회의 증언에서 ” 궁정동 안가에 박대통령은 한달이면 열 번이나 그곳에 왔다” 말했다.

    박선호의 진술에 의하면 이 집은 암살사건으로부터 10년전인 60년대말 이후락(6대 중정부장)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부터 대통령의 특별한 안가로 사용되었다.

    “박대통령은 궁정동 안가를 만들기 전에는 위장번호를 단 승용차로 밤나들이를 하곤 하였다. 당시에는 박종규만이 야행시간과 장소를 아는 ‘천기’에 속했다. 육여사는 별도의 정보망으로 야행을 감시, 꼬투리가 잡히면 박경호 실장에게 따지고 심한 부부싸움을 하곤 했다. 그러나 모두가 못 본 체 모른 체 하고 넘어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박대통령은 스태미나가 절륜했고 상대는 두세 차례 만난 뒤 꼭 바꾸었다. 그래서 교유 여배우 숫자가 많아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10・26 당시 박선호(중정 의전과장)의 법정 최후 진술)

    100여명에 가까운 연예인이 이곳을 다녀갔다. 세검정에도 비슷한 안가가 있었으나 청와대와의 거리가 멀어 궁정동이 주로 쓰였다. 잡지나 TV에서 대상이 선정되면 궁정동에서 가까운 내자호텔로 불렀다. 부르는 과정에 회유도 압력도 있었다. 예컨대 79년 10・26 당일 오후 5시 20분 가수 심수봉은 내자호텔 커피솝에서 대학생 모델 신양은 프라자호텔에서 각각 궁정동으로 인도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문란한 여성편력은 육영수여사의 사후 한층 더 심해졌다. 궁정도 안가에서는 사흘에 한번 꼴로 ‘대행사’, ‘소행사’로 불리는 미녀파티가 열렸고 측근들 사이에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한 경쟁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은 여성관은 당시 고위층들의 입에서 흔히 오르내리던 ‘배꼽 아래 인격 없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2004년 05월31일 [04:25] ⓒ 뉴스툰

    일본 커넥션-박정희 정권과 친한파

    4 · 19 혁명의 희망을 쿠데타로 무산시킨 박정희.

    그의 20년 장기집권 뒤에도 역시 일본 커넥션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지하철 차량 도입 사건이다. 박 정권이 일본에서 지하철 차량을 도입하면서 거액에 정치자금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핫이슈로 다루어졌다. 의혹은 일본에 4개 회사가 한국에 납품하는 지하철 차량 가격을 2배나 높게 받은데서 비롯됐다. 4개 회사가 지하철 차량 납품으로 거둔 이익은 모두 21억 7천만엔. 미쓰비시 상사 사장은 그중에 250만 달러를 한국 유력 인사의 지시로 한국외환은행 뉴욕지점에 송금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 유력 인사가 누구인지 더 이상은 밝히지 않았다. 한국에 유력 인사가 누구인지는 당시 아사히 신문 사회부 기자 오치아이 씨에 의해 밝혀졌다. 그는 일본에 정치가와 관료, 기업에 유착관계를 오랫동안 취재해왔다.

    오치아이 히로부미 아사히 신문 편집국장-“그 돈에 취지를 물어보니 특별 커미션이란 말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리베이트 입니다. 저는 취재를 더 진행해서 상사도 정부도 말 못하는 한국의 거물이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체이스 맨하탄과 외환은행에 구좌명을 알아보니 이름이 알파벳으로 S.K.KIM 이었습니다. 즉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인 김성곤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그런데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됐다.

    김성곤 계좌로 입금된 250만 달러 중 120만 달러가 한국으로 가고 나머지 130만 달러가 일본으로 역송금된 것이다.

    오치아이 히로부미 아사히 신문 편집국장-“이 단계에서 일본은 그야말로 대소동이 일어납니다. 이 130만 달러는 실은 일본 정치가에게 간 것이 아니냐고 모두 생각한 것입니다.”

    일본에 정치인은 전직 수상은 2명이며 그 중 한명으로 기시 전 수상의 이름이 거론됐다.

    히시키 카즈요시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 특파원-“한국 그 철도공사 입찰에 대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기시 전 수상에게 부탁해서 직접 담판 했습니다. 김형욱 부장이 자신이 조언을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를 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 커넥션의 상대역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수상. 일본이 대소련 전쟁기지로 건설한 만주국은 그의 작품이었다. 41년 부터는 도조 내각에서 상공대신과 국무대신을 역임, 대동아 공영권을 수립하는 성전을 수행하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복역하면서도 그는 냉전 돌입에 따른 국제 질서 변화 속에서 일본의 전략에 고심한다.

    히시키 카즈요시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 특파원-“기본적으로 스케일이 큰 정치가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느 아시아 전체를 놓고 정치를 폈습니다.”

    함께 전범으로 기소된 도조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반면 기시는 무죄로 풀려난다. 냉전체제로 돌입하면서 미국의 대일정책이 변화된 때문이었다.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한 기시는 자민당을 창당, 일본의 이른바 55년 체제를 이끌어 나간다. 기시 전 수상이 한일관계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는 5 · 16 쿠데타였다. 쿠데타의 실세 박정희의 일본 이름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출신인 박정희는 만주국의 건설자 기시 전 수상과 같은 만주 인맥이었다. 61년 11월 이케다 수상과 회담 후 박정희는 도쿄 시내의 한 요정에서

    『20세기의 리더들』-기시 노부스케 저

    “우리는 일본 명치 유신 당시 지사들의 마음과 같습니다…특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기시 전 수상에게 “우리는 일본 명치 유신 지사들의 의지와 같다. 앞으로 새한국 건설을 위해 좋은 의견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 기시 전 수상은 박정희의 후원가가 된다. 기시 전 수상이 관여해 정치자금을 조성해 준 것으로 의심받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본 쌀 도입이다. 일본 쌀은 69년부터 3차례에 걸쳐 103만톤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것이 일본 의회에서 문제가 됐다.

    일본 참의원 자료실. 이곳에는 73년 쌀을 둘러싼 일본 국회에서의 논란이 모두 속기록으로 보관돼 있다. 논란의 핵심은 박 정권에 대한 특혜시비였다. 당시 도입 조건은 30년 안에 현물로 상환한다는 거저나 다름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박 정권은 그것을 국내가격으로 시중에 판매했고 270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카리 아키라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장-“그 쌀이 일본의 원조미라는 형식으로 한국국민에게 전해졌다면은 뭐 아무 문제가 없죠. 하지만 여수하고 인천, 그리고 포항의 항구에 내려진 일본 쌀들은 그 시점부터 일본의 원조미가 아니라 한국의 보유미로 둔갑을 하게 됐습니다. 그게 만약 돈이 되면은 당시에 정치 상황 헌법을 개정해서 3선 출마를 가능하게 할 정치자금이 되는 것입니다.”

    103만톤의 쌀은 일본 돈으로 1300억엔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식량관리법은 쌀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법률적 근거 없이 이것을 빌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수상으로 있던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기시 전 수상의 친동생이었다. 기시 전 수상은 일본 국회의 반대를 무마하고 국내법상의 문제를 법 개정으로 해결하면서 박 정권에게 쌀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70년, 기시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1등 수교 훈장을 받는다. 그가 이렇게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지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히시키 카즈요시 당시 아사히 신문 서울특파원-“기시 전 수상은 미국과 같은 노선을 펴서 아시아를 지킨다라는 형태로 일본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사고 속에는 언제나 한반도가 들어있었죠. 따라서 공산주의의 침투에 대해 한국을 전위국가로 지원한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냉전체제 속에서 일본의 세계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기시 전 수상. 그에게 남한은 일본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주는 방파제였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일본의 극우단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노다 아키히로 당시 공동통신 서울특파원-“반공(反共)에 대해서 우익, 특히 일본 애국당을 비롯한 극우의 단체가 친한파였습니다. 심한 표현으로는 반공을 위해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십자가에 매달려야 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집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죠. 그렇다면 도대체 친한파란 무엇이겠습니까.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 한국이 희생양이 되어달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않겠습니까.

    80년 당시 일본이 북한 남침설을 제공해 신군부의 집권을 도왔다는 주장 역시 당시 일본이 가졌던 위기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박선원 박사 연세대 국제학 연구소-“1980년 4월 24일 미국이 이란에 인질을 구출하는데 실패한 이후 약 3~4일 동안, 즉 1950년대 이후 서태평양에서 최초로 3~4일 동안 미국의 항공모함이 있지않고 중동으로 향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홋카이도에 가까운 북방 4개섬에 소련에 무장력이 급속하게 증진하고 있는 그런 시점에서 본다면 일본으로선 상당히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정치적 안정을 바랬을 것이고 그 정치적 안정을 유도해 내는 가장 유력한 수단은 남침 가능성을 한국에 전달함으로써 전두환 그룹이 조기에 상황을 정리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라고 판단을 해서 이런 의도적인 정보공작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일본의 안전을 위해 평생을 바쳐 온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그가 한국에 올림픽을 양보한 것 역시 한국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카시마 노부요시 오끼나와 유구대학 교수-“올림픽을 한국에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세지마는 한국을 일본이 병합했을 때 발상과 같은 맥락으로 보셔야 됩니다. 즉 이것은 한국이 힘을 갖게되면 일본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죠. 일본을 위해서 한국이 그만큼 부담을 나누려면 올림픽을 통해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재오 국회의원-“일본에 정치인들은요 딱 밖에 나오면요 여야가 없습니다. 오직 일본국에 자국의 이해입니다. 그거는 일종의 일본제국에 대한 향수에 근거 있다고도 봐야죠. 과거에 우리가 이런 나라였는데 대동아 공영권에 중심이었는데”

    남한에 대한 경제원조에 일본의 친한파가 적극 나섰던 것도 자국에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차관 제공 20억 달러

    대한무역흑자 86억 달러

    20억 달러의 자본을 빌려준 결과로 12년 동안 86억 달러의 대한무역흑자를 거두어 갔다.

    김영호 장관 산업자원부-“일본이 경제를 부흥시켜야 되겠다는 미국의 전략과 그걸 위해서는 한국이나 대만같은 이런 후방기지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런 전략을 배경으로 해서 그 당시 한국으로 봐서는 박정희 군사 정권 체제가 들어서고 난 후에 경제를 재건해가지고 혁명을, 그 당시 5 · 16 군사 쿠데타를 정당화할려고 하는, 또 그 당시 워낙 가난했으니까요. 그것이 현실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추진하는데 일본 돈이 필요로 했던 것이죠.

    또 일본은 그 당시가 되면은 이제 말하자면 이제 해외시장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단계. 그러고 그 경제원조는 바로 일본의 이제 수출시장을 넓힐려고 하는 바로 그런 일본 시장의 일본 자본주의의 대팽창의, 전후 새로운 팽창의 일환으로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그렇다면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수출 촉진을 위해 박 정권이 70년대 중반에 추진한 종합상사 육성 방안은 상징적인 의미를 던지고 있다. 종합상사 육성 방안은 사실 세지마 류조에게서 아이디어를 받은 것이었다.

    김도형 연구위원 산업연구원-“종합상사의 경우에는 수출만에 기능을 우리가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에 종합상사가 제대로 건전한 발전을 하는 데 있어서 수입에 기능, 또 삼국간 거래에 기능을 무시한 채 제대로 발전을 못하는 그런 하나의 계기도 됐지 않은 점에서 제대로 그 당시 전문가가 있었더라면은 제대로 평가해서 제도를 도입했으면 좋았다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제적 지원으로 우리가 놀랄만한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지속된 대일경제의존은 현재에 이르러 심각한 경제종속을 낳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영호 장관 산업자원부-“가마우지 아시죠. 가마우지는 오리과에 속하는 겁니다만은 목이 길고 가늘고 그렇죠. 거기에 이렇게 쇠줄을 묶어놓으면요 물속에 가마우지가 다른 고기를 먹을려고 들어가면은 고 순간에 쇠줄을 잡아 당기면요 고기를 문 채로 못 넘기고 물고 오죠. 그럼 뺏아서, 입에서 뺏아가지고 집어 넣으면 고기가 잡히는 거죠. 가마우지 낚시법인데 한국이 부품, 소재, 기계 일본서 가져와 가지고 한국에 저임금 노동하고 결합해서 그걸 미국에다 수출해가지고 돈 번 것을 다시 그 돈을 일본 다 갖다주죠. 일본서 또 부품, 소재 가져와가지고 또 만들어가지고 또 미국에 수출해서 그 돈 또 일본 다 갖다주죠. 우리가 지난 65년부터 최근까지 무려 35년간 한국이 가마우지 노릇을 했는데”

    물론 쿠데타 정권과 일본의 관계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정권이든지 대일외교는 국익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대일외교는 ‘검은 유착’ 또는 ‘커넥션’ 이라는 말로 일본인들 사이에 불리고 있다는 점이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김중배 상임대표 언론개혁 시민연대-“이거는 정통성이 없는 정부, 그러고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정부. 그렇기 때문에 ‘우리'(일본)한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경제적으로는 더욱 그렇다.

    대일무역적자라는 것은 거의 우리가 영원히 해소할 수 없는 숙제로 지금도 남아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를 대단히 멸시하게 하는 이런 요인이 내적 근거가 아니겠는가. 그러고 우리 사회적인 여러가지 상황들 이런 것이 그리고 또 당당한, 아니 당당히 못한 지도자들에 대응”

    강창일 교수 배재대학교 세계지역학부-“결과적으론 겉으로는 반일감정을 선동하면서 속으로는 실리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실리도 국민을 위한 실리가 아니라 자기 그 정치집단 어느 세력에 경제적 실리 혹은 정치적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죠. 그런 것들이 곧 한국인에 일본인식, 제대로 된 일본인식 같은 걸 큰 장애로 지금까지 작용하고 있죠.”

    쿠데타 정권에 일본 커넥션에 관여했던, 혹은 그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들은 모두 취재를 거부했다. 따라서 대부분에 사실들은 일본 쪽에 증언에 의해 밝혀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정권에 지지와 국가에 안전을 일본에 의존했다는 말을 들을 것인가. 우리는 왜 아직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가.


    2000년 8월 6일 자 방송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일본 커넥션-쿠데타 정권과 친한파’ 편에서 발췌


    우리는 미국 문서를 분석하는 가운데 한일협정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불법 정치자금 거래가 있었음을 지적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별 보고서-한일관계의 미래

    미 중앙정보국

    1966년 CIA가 작성한 내부 보고서다.

    민주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다.

    당시 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1961-65년 사이의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

    또 6,7차 한일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에 일본 기업들이 민주공화당 예산에 3분의 2를 제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6개 일본 기업이 총 6,600만 달러를 지불했고, 기업 별로 액수는 1백만-2천만 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6개 기업이 총 6,600만 달러를 지불했고 기업 별로 1백만에서 2천만 달러에 이르는 돈을 지불했다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밝히고 있다.

    김종필은 한일협상을 추진한 대가와 일본 기업들로부터 한국에서 독점권을 행사하도록 해 준 대가를 받았으며,

    당시 박 정권의 실세였던 김종필도 한일협상을 추진한 대가, 또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서 독점권을 갖도록 해 준 대가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한국 정부가 방출한 쌀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을 함께 통제했던 8개 한국 기업들이 민주공화당에게 115,000 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한국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8개 한국 기업들이 민주공화당에 돈을 줬다는 내용도 함께 기록돼 있었다.

    이런 사실에 출처를 밝히지 않은 CIA 보고서에는 주목할 만한 표현이 있다. well founded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이 표현이 가지는 의미와 신뢰도에 대해 미국인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Rob 교수/한국외국어대 영어교육과-well founded 의 의미는 근거가 있고 신용할만하며 증거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주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다음 문장에 통계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총 6,600만 달러라는 숫자, 6개 회사가 총 6,600만 달러를, 각각 1백만불부터 2천만불씩 지불했다는 것” 거기에는 특정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CIA 문건과 연관성이 있어보이는 또 다른 미 국무성 문서를 입수했다.

    국무성 전문

    1964년 5월 20일

    발신 : 서울

    비밀

    1964년 주한 미 대사가 미 국무성으로 보낸 전문이다.

    그는(박정희) 김종필을 당 의장직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왜 미리 그를 제외시키지 않았냐고 물었다.

    문서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버거 미 대사에게 김종필을 제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그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첫째는 오노(자민당 부총재)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오노는 김종필이 제거된다면 일본과의 협정타결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이후 둘에 대화과정에서 박정희는 자민당 부총재인 오노에 편지 내용을 소개하면서 오노가 김종필이 제외되면 한일협정 타결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해 제외시키지 못했다고 문서는 전하고 있다.


    2004년 8월 15일 자 방송 KBS 일요스페셜-‘[최초공개!] 베일 속의 한일협정, 문서 한일 양국은 왜 40년 동안 침묵하나?’ 편에서 발췌

    출처 : http://cafe.naver.com/anti516park.c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