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교의 구원과 믿음에 관한 생각

  • #100864
    한국인 71.***.190.122 2363

    구원과 믿음에 관한 얘기를 하기전에 집단 생활에서의 규율과 그것을 어길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규율을 어겼을 때의 공포감은 체벌이 강한 사회일 수록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규율을 어기고 체벌을 기다리는 사람은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다. 여기에 조직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체벌을 면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고 하면 귀가 솔깃해 질 것이다. 하지만 체벌을 능히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도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얘기를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한 종결 죽음을 생각해 보면 죽음 자체만으로도 상상하기도 싫은 공포감에 살고 싶어 발버둥 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아가 사후의 체벌 마저도 생각하면 눈 앞이 캄캄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자가 있고 그만 믿으면 모든 죄가 사해진다고 하면 전도는 한결 쉬울 것이다. 그리면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믿어지는 순간 보통 느끼는 기쁜일 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의 자신의 매 행위가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생각하면 하루 하루가 조심스러워 지고 좋은 일이 있으면 무척이나 감사할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죽음도 자연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여 순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공포가 아니고 더더욱 사후세계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는데 원죄로 인한 죽음과 사후의 천국생활 보장 같은 아무리 달콤한 얘기를 들이대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은 뻔한 것이다.

    • 평신도 68.***.182.42

      믿음에 대해서는 마틴 루터의 ‘로마서 강해’가 설명을 잘 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을 잘 읽으면 알수도 있구요.

    • roundone 68.***.71.82

      한국인님:
      참신한 각도에서의 생각을 나눠주셔서 많이 도움이 됩니다.

    • 평신도 68.***.178.254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 점프 128.***.230.81

      좀 다른 관점입니다만…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눈에 띄는게 있다면,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진리도 깨달음도 아니고요… 물론 교회 자체는 구원을 더 강조하지만… 그건 어쩌면 현세에서의 본능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아닌지 싶구요…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도 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다른 주요 종교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가슴 뭉클한 순간을 소중히 기억하시고, 또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아이를 보면서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감정의 rush를 느끼셨다면… 사랑의 약속 앞에 진리나 깨달음이 무의미하다고 생각지 않으실까요.
      제 개인적인 신앙 관점입니다.

    • 한국인 71.***.190.122

      물론 사랑은 예수님이 새로 내린 계명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인간뿐아니라 다른 동물에도 내재된 본성이기도 합니다.
      선현께서는 이것을 측은지심이라 하여 인간의 네 본성중 하나로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의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의미를 잘 설명했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여기에 한가지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상대를 모를 때는 사랑 보다는 시비를 가지를 마음이 앞선다고 봅니다.
      나보다 센지 못한지 잘못하고 있는지 잘하고 있는지 만나면 일단 열심히 탐색부터 합니다. 그리고 그 상대가 같은 종류의 인간이 아닌 아주 큰 상대 자연 현상 같은 것에서 실체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으면 두렵고 무섭거나 경외심 같은게 생긴다고 봅니다.

      그예로써 어렸을 때 밤김을 혼자 걸으면 많은 이들이 공포를 느끼나 든든한 사람과 같이 걸으면 공포는 적어지고, 나중에 같은 길을 자주 자니면서 밤공기, 풀벌레 소리, 달빛, 나무 그림자 등과 익숙해 지면 밤길을 더이상 공포가 아니고 아름다움으로 바뀝니다. 여기서 사랑이 싹틀 수 있다고 봅니다.

      또 한가지 일전에 자동차 세일즈 왕에 관한 책에 나온 얘기인데,
      어떤 사람이 번잡한 백화점 앞에 차를 세워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너무 불편했다고 합니다. 너도 나도 어떤놈이 하면서 불평하는데, 백화점에서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힘들게 백화점에서 나와 그차를 타고 몰고 가는 걸 보고는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렇든 사람들은 상대에 대한 이해가 되면 사랑도 생김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tracer 198.***.38.59

      한국인님, 아주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 hmm 208.***.144.60

      어느 직장이나 공공의 적 혹은 왕따가 있습니다. 그런 적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은 뭉치게 되죠. 식사시간에도 업무시간이후에도 특히 한국은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왕따나 공공의 적이 사라지고 난뒤에는 같이 뭉쳤던 사람들끼리 견제를 하거나 또다른 공공의 적을 찾아 다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지요. 애초에 인간에게 사랑은 주관적인 사랑, 즉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외에는 말할 수 있는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헌신해서 남을 위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몇명이나 되겠습니다.

      가끔, 한국에 부모가 물려준 재산때문에 형제들끼리 서로 싸우고 법정투쟁까지 버리는 기사를 보게됩니다. 그형제들은 서로를 충분히 알지 못해서 그렇게 싸울까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불교 기독교 유교를 포함한 종교가 없었다면, 아마 이세상에는 주관적인 사랑 즉, 부모의 사랑 그리고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랑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마지막 사랑은 순수한 사랑보다는 동지애와 같은 성향이 더강하겠지요.

    • 한국인 71.***.190.122

      hmm님/

      왕따 문제는 저도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해 뭐라 답을 드릴 수 없지만, 일대일 상태라면 서로가 잘 이해되기 쉬울 테지만, 다대일 상태면 개인의 심정외에 집단의 심리가 작용해서 왕따 현상 같이 것이 있다고 봅니다. 비단 이일 뿐 아니라 인간들의 집단적 광기도 엄연히 있는 현상이고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도 서로에 대한 이해에 대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과도한 보살핌이나 빈약한 보살핌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적당한 선을 찾는 위해서는 항상 예의 주시하며 상황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형제들끼리의 싸움은 서로 충분히 알지 못해서 그럴까 하는 의문이 있으신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 처럼 형제라도 서로의 속 마음을 내 보이지 않으면 서로를 예단하여 불신의 골이 깊어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