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채식주의

  • #100803
    키히 143.***.138.186 2096

    tracer님 다시 만나는군요. 반갑습니다 ^^

    일단, 제가 좀 까탈스럽게 군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윤리적’이라는 표현은 ‘윤리’가 정의되지 않으면 논할 수 없는 문제이니까 저는 앞으로 ‘합리적’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이야길 해 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육식을 도덕적으로 금하지만, 많은 종교에서는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불자가 아니라 먹기 위해서 동물을 죽이는 것은 거리낌이 없지만, 재미로 동물을 죽이는 건 좀 안좋은 기분이고, 물건을 훔치는 게 죄책감이 가장 크군요. 그러고보면 저의 윤리관은 생태계보다는 인간 사회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네요.)

    그리고, 저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라서 의견이 편향될 수 있으며, 이 글에서는 되도록 객관적인 팩트를 (다소 편향적일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나열해 보는 게 목적이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저는 (건강을 위해서건 윤리를 위해서건) 채식주의로 결정한 사람들을 비웃지도 않으며 존경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단지, ‘저는 채식주의자인데 생선은 먹어요’라고 말하는 (채식주의의 뜻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만 약간 비웃습니다 (이 경우 어식과 채식을 해요 라고 해야 하나..).

    일단, 베지테리언과 카니보어의 차이를 몇가지 정리한 게 있는데,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spoonrevolution.com/reason.php?reason_type=health
    보면,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Dr. William Collins’로 시작하는 문장 근처에 있습니다: 육식 동물은 콜레스테롤 소화 능력이 무한대에 가까운데, 초식동물은 아니더라. 건강을 생각한다면 육식보단 채식이 더 좋은 선택이라는 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이지요. 그 얘기는, 우리 신체가 육식보다는 채식에 맞게 가꾸어져 있다는 근거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기적으로만 생각하더라도 건강을 중심으로 고려하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육식보단 채식인 것이겠지요.

    ‘고통’ 역시 정의하기 나름인데, 고통을 신경 물질의 전달 및 그에 따른 신체 반응으로 정의한다면, 식물 역시 그에 준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면, 잔디를 깎으면 풀냄새가 그윽하게 퍼지는데, 그건 바로 증발한 수액입니다. 수액은 식물이 상처를 입었을 때 발생시키는 물질이며, 수액이 퍼지면 주변 식물들이 그에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니 눈에 보이는 반응은 없습니다만..) 특히 잎에 독이 있는 식물이 많으며 씨앗에는 치명적인 독성분이 있는 식물(은행/살구/사과 등)이 많다는 것을 보면 식물 역시 잡아먹히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은 적어도 눈에 보이는 정도의 큰 생물들에서는 명백하죠. 순환계가 제대로 동작하고 세포들이 그 순환 활동에 참여하면 살아있는 것이고, 생명 상태를 중단시키는 행동이 살생이죠.

    “사람의 눈에 보이는 정도의 큰” 생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생명을 중단시키지도 않는 것을 윤리로 정의한다면 채식도 이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모든’ 생물을 대상으로 하면 세균도 죽여서는 안되니 손도 씻어서는 안될테니 눈에 보이는 생물로 제한했습니다). 다만 채식은 이러한 가혹한 조건에서도 육식과 다르게 윤리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의 손톱, 발톱, 머리카락 처럼 식물에게도 순환기관이 연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바로 종자입니다.

    즉, 거대 생물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고 생명을 빼앗고 싶지도 않은 마음에 채식주의로 결정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은 과실이나 곡식 등을 섭취하는 방법입니다. 단, 이 경우에도 곡식이라면 석기시대 이후로 개발된 탈곡 방식들은 모두 식물을 죽인 다음 효율적으로 종자를 털어내는 방식이니 사용하면 안되고, 이삭줍기와 같은 방식으로 추수를 해야만 하겠지요. 그리고 과일들은 익어서 떨어진 다음에 섭취하면 되구요. 그리고 배아는 먹고 씨앗은 꼭 땅에 심어주어야 합니다. (으음.. 어쩌면 곡식을 먹는 건 안 될지도 모르겠군요. 배아를 제거하면 싹이 나지 않으니..)

    문제는 뿌리채소 및 줄기채소를 섭취하지 않고, 각종 열매 채소(토마토, 수박 등)들 및 과일과 곡식만으로 영양소를 다 채울 수 있냐는 점인데, 잘은 모르겠지만 식물의 종류가 다양하므로 아마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

    중간에 ‘알약’으로 영양소를 섭취하는 얘기가 나왔는데, 원글에서처럼 ‘부족한 몇몇 영양소를 보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느 댓글에서처럼 ‘모든 영양소를 알약으로 섭취’하는 것은 아마 상당히 어려운 일일 겁니다. 식품에는 아직 신체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려지지 않은 ‘미량원소’들이 존재하고, 이들을 제거했을 때 영양 결핍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해당 미량원소들을 모두 밝혀내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요. 비타민 C조차 바다항해 중 괴혈병을 앓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성분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결국 이러한 연구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해보면 그 결과물은 기아 상태의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힘들테고, 그냥 라면 한박스씩 보내는 게 훨씬 효율적일 겁니다 (라면 스프엔 돼지고기가 들어가므로 채식이 아님에 유의).

    효용면에서 생각해보면, 확실히 육식은 비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식용가축들이 먹어치우는 식량이 전체 생산량의 1/3이나 된다고 하죠.. 소들을 키우기 위한 목초 경작지에서 곡식을 재배하면 10억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라고 하네요. 식량 수급이 좋지 않던 시절에는 영양소가 농축되어 있는 동물들이 좋은 영양 공급원으로 기능하여 가축으로 기르기 시작했지만, 각종 식품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는 굳이 비효율적인 육식을 지속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거론한 효용 문제는 결국 윤리 문제로도 돌아오게 되는데 (이 부분은 인간사회에 적용되는 것이라 보편적인 윤리관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단편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먹는 소를 먹이기 위해서 키운 곡식들을 인간이 먹었다면 내가 먹고나서 기아로 허덕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았을 텐데 하는 양심의 문제 때문입니다. 물론, 이 상상은 매우 단편적인 것으로서, 어차피 목초 생산지는 기아 발생지와 대체로 멀고, 자본주의 체제를 고려했을 때 소를 사육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땅에서 기아민들을 위한 곡물을 생산하고 먼곳으로 수송하면서도 헐값에 판매할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즉, 가축의 사육을 중지한다면 식량의 여분이 기아민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식량 생산이 2/3으로 줄어드는 결과로 귀착되겠지요.

    결론은?
    제 생각은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일반적인 채식주의자가 육식자들을 윤리적인 면에서 비난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단계의 채식주의가 있을 수 있을 텐데, 극단으로 가면 과일만 먹고 피혁제품도 금지하는 근본주의적 생명본위주의자가 있을 수 있고, 가장 물렁하게 가면 우유, 계란까지는 먹는 건강식 채식주의자가 있을 수 있겠죠. 참고로 대체로 제가 아는 보편적 채식주의자(동물성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는 류의)들은 자기수양에 가까운 분위기라서 남들을 비난하거나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함께 먹는 자리에서 자신은 채식을 하지만 남들이 육식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지도 않았구요. 채식주의자보다 오히려 육식자들이 타인의 식취향에 대해 윤리적인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아요. (푸아그라를 먹는 프랑스인이 한국의 개고기를 비윤리적이라 욕하는 등의..)

    같은 의미에서 육식자들이 채식주의자들을 비웃을 근거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서로다른 자신만의 기준 및 취향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모순된 기준이라면 맘껏 비웃어줘도 될 테고 (생명을 사랑해서 채식주의자인데 생선은 먹는..) 자신의 기준을 남에게 확대 적용하려 한다면 그때는 좋은 기분으로 대하기 힘들어지겠죠.

    • tracer 198.***.38.59

      잘 읽었습니다.
      저는 fruit만 먹는 방식으로 사는 것은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불충분하다고 생각되고 너무 극단적이라고 보구요.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을 죽여야 한다면 그 중에서 최소한의 고통이나 해악을 일으키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원글에서 언급한 utilitarian의 관점입니다.)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연구에 대해서는 저도 몇개 읽은 바 있지만, 그것이 인간을 포함한 신경계가 복잡하게 발달된 척추동물들이 느끼는 고통에 준하게 비교하기에는 아직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시 언급하셨듯이, 육식행위에 참여함으로써 공장생산형 고기공급 시장의 형성에 모티브를 주는 것이 추가적으로 윤리적 채식주의의 동기가 될 수 있겠지요.

      말씀하신대로 저도 한 밥상에서 고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대놓고 비난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각자 개개인의 선택이니까요. 하지만, 따져보았을 때, 육식보다 채식이 조금 “더”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한, 정직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제 채식의 이유를 물어보았을 때 위와 같이 설명하면 육식하는 사람이 좀 “덜” 윤리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는 의미를 impose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합니다.)

    • tracer 198.***.38.59

      키히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1. 고기를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
      2. 우유와 치즈는 먹되 고기와 생선, 새우, 조개등은 먹지 않는 사람
      3. 우유, 치즈, 고기, 생선은 먹되 새우와 조개등은 먹지 않는 사람
      4. 낙농류는 전혀 먹지 않고 채식만 하는 사람

      위의 사람들이 모두 윤리적으로 동등한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어떤 것이 조금 더 윤리적이고 덜 윤리적인 구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임동동 74.***.47.2

      1,2,3,4 윤리적으로 다 거기서 거기라고 봅니다.
      윤리적으로 동등하지는 않지만 뭐 딱히 구분지을것도 없다고 봅니다.
      오십보 백보라는 얘기죠.

      키히님이 아니라서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 tracer 198.***.38.59

      임동동님/
      윤리적인 정도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차이가 근소해서 구분을 가질 필요를 못 느끼신다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그 차이를 무시할만큼 근소하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만일 그 차이를 무시못할만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육류에 대한 demand가 줄어들고, 공장형의 잔인한 육류 생산이 줄어들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분 상한 것 전혀 없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더 좋습니다. ^^)

    • 키히 143.***.138.186

      이미 윗글에 나와있습니다만, 저의 윤리관으로는 1~4번 모두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각자의 윤리관에 따라 허용되는 단계가 다를텐데, 1<2,3<4 으로 감에 따라 더 강한 윤리 규정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1-4번을 모두 같은 급으로 받아들이는 제 윤리관이 너무 느슨한 건가요?)

      그리고 저는 사실 4번도 말씀하신 면에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원글에도 썼지만, 일단 ‘나는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채식을 해’라는 주장은 이룰 수 없는 거짓말이고 (문명의 혜택을 버리고 인도 같은 데서 살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씻지도 않고..), 대신 ‘나는 거대 생물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채식을 해.’라고 말하고 싶으면 열매채소+과일 만으로 연명을 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모피/피혁 제품은 일절 사용하지 않으며 동식물 실험에도 반대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결과적으로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석유 제품의 사용도 전혀 하지 않는 자연주의자들이겠죠?

      ‘나는 동물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채식을 해. 식물은 사랑하지 않아.’ 정도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인 것 같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동물들을 아프거나 죽게 하고 싶지 않아’ 정도가 가장 보편적인 주장이겠군요 (개를 안 먹는 종류의).

      식물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셨는데, 마찬가지로 ‘동물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주장이 근래까지 보편적이었지요.

    • 키히 143.***.138.186

      일단 단계적으로 나열해보겠습니다.

      1. 고통을 주는 행동은 나쁜 것이다.
      1-1. 고통을 느끼지 않게 죽이면 될 거 아녀? (자고 있는 상태나 마취 상태에서 죽이는 방법도 있고..) 그럼 육식도 문제 없다.
      1-2. 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않고 동물은 고통을 느낀다. 따라서 육식보단 채식을 하자
      1-3.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 따라서 채식이나 육식이나 같다. (그냥 굶어죽자?)

      2.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중단시키는 행위가 문제다.
      2-1.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 내가 먼저 살아야지. 그냥 다 먹자.
      2-2. 최소한으로 생명을 죽이는 방향으로 가자. 육식을 하려면 초식동물이 먹은 채소도 죽이고 동물도 죽이는 것이니 동물은 죽이지 말고 채소를 바로 먹자. 물론 나의 삶을 연장시키기 위해 죽어간 채소들에게는 사죄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2-3. 생명을 죽이지 않고도 영양을 섭취할 수 있다. 각종 열매만 먹자.

      이렇게 문제를 정의하면 고통과 생명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윤리/비윤리를 가르는 잣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효율성 및 환경파괴문제는 일단 보류하기로 하죠)

      일단 생명의 부분은 제가 말한대로 명확합니다 (거대생물체에서는).
      tracer님은 글 중간중간에서 고통 부분에 중점을 두는 듯한 모습이 보이는데요,
      그렇다면 고통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 되겠죠.

      저는 고통을 ‘생명의 중단 가능성을 알리는 신호’라고 봅니다. 즉, 고통이란 것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현상이 아니라 단지 신호일 뿐이란 것입니다. 통각을 상실한 채로 태어난 아이가 (가벼운 출혈 등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도) 쉽게 목숨을 잃고 마는 것을 보면, 고통의 기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고통을 유발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이고 생명을 거두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근본적인 기준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라고 표현을 한 것이고, 사실 식물이 통증 요인에 대해 얼마나 강한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식물도 죽고 싶지 않아 한다’라는 것이죠.

      대상이 식물이건 동물이건, 포식자의 행위는 피식자가 축적한 영양분을 적은 수고로 탈취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피식자의 생명을 중단시키죠. 일부 식물은 포식행위를 역이용하여 자신의 순환계에서 단절시킨 종자를 포식자에게 내어줌으로서 이동 번식을 수행하기도 하죠.

      저의 윤리관은 인간 중심적이라 대상이 식물이건 동물이건 상대의 생명을 빼앗고 그간의 축적한 영양분을 탈취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잔인한가요?). 그보다는 사람이 축적한 부를 부정한 방법으로 갈취하는 것(shoplift?)에 더 죄책감을 느낍니다. 다만, 기왕 죽이는 것 큰 고통없이 죽이는 편이 여러면에서 유익하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인간의 잔인성을 억제하고, 고기에 고통 전달 물질이 퍼지는 것을 막는 면에서)

      생명 탈취가 영양분 섭취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여흥인 경우를 생각해보죠. 사람들은 흔히 낛시를 사냥보다는 덜 잔인한 취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어차피 여흥을 위해 대상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지 않나요? 사람들은 자신과 (유전적으로) 가까울 수록 감정이입을 더 잘 하는 경향이 있지만,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조차 전기충격을 가하면 그 위치는 피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생명을 보전하려는 욕구는 사람의 판단과는 상관없이 모든 종에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 tracer 198.***.38.59

      키히님/
      잘 들었습니다.

      첫번째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저의 윤리관은utilitarian/consequentialist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데에 있어서 가능하면 더 많은 선을 초래하고, 가능하면 적은 악을 초래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real world는 윤리적인 행동, 비윤리적인 행동, 이렇게 두 가지로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회색지대와 예외상황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이 어느 정도의 선과 악을 동시에 초래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위에 자세히 구분지어 놓은 것이 근소한 차이로 윤리적인 정도 차이를 무시할 수 있다고 하시지만, 한 사람이 일년 동안 우유는 먹어도 고기는 안 먹게 되면 조금은 더 좋은 결과를 낫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차이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피해를 입는 쪽은 식물이나 동물, 생명을 빼앗기는 측입니다. 우리의 내면적 사고가 일관성있고 정직한가, 아니면 모순되고 위선적인가는 피해입는 입장에서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행하는가가 그들의 목숨을 좌우하지요.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아야만 우리가 생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동물로서 피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어떠한 선택이 가장 적은 악을 행하는가를 저울질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울질하는 데 있어서 잣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고통의 유무를 적용하는 것이지요.

      진정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 생존의 위협을 받았을 때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신호와 반응 정도로 좁혀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커다란 뇌를 가졌을 때 그에 따라 우리는 더욱 생생하고 의식적인 아픔을 느끼는 능력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호에도 경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뇌와 발달된 신경체계가 없어서 자기 의식이 없다고 생각되는 식물의 생존위협에 대한 반응과 신호를 우리와 소, 돼지같은 동물들이 생생하게 의식하고 느끼는 고통과 한데 뭉뚱그려서 생각할 수는 없겠지요.
      (이 부분은 키히님도 동의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고통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동물을 죽이지 않으면 그만큼의 수반하는 고통과 스트레스를 없앨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고기도 먹고 야채도 먹는 것보다 야채만 먹는 것이 좀 더 윤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움직일 수도 없고, 의식도 없는 식물과, 욕구를 해결할 때 만족감을 가질 수 있고, 자기의 자식들을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진 삶을 살 수 있는 잠재성/가능성을 가진 동물들의 생명을 동일하게 따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도 동물인데 인간을 죽이는 것과 동물을 죽이는 것에 차이를 두시지 않습니까? 그것과 같은 이유로 같은 생명체이긴 하지만 동물과 식물의 생명을 바라보는 차이를 둘 수 있겠지요.

      동물을 도륙할 때 고통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한 이유도 그 고통을 느끼는 동물 입장이 아닌, 도륙자인 인간의 잔인성을 억제하고 고기의 품질을 더 좋게 하려는 목적이라는 키히님의 극단적인 “인간 중심적”인 윤리관은 왜 인간에서 그칠 수 밖에 없는지 궁금합니다. 자기 인종 중심적인 윤리관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인종에게는 다른 윤리적 잣대를 적용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으신가요?

      만일,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면, 식물도 그 나름대로의 고통을 없이 죽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겠네요. 동물의 고통과 식물의 고통을 동일하게 생각하신다면, 동물의 고통을 없애는 노력과 식물의 고통을 없애는 노력이 동일하게 시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 키히 143.***.138.186

      임의로 정한 순서대로 답변해 보겠습니다. 제가 나열하는 질문에 tracer님도 답변해보시면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좀 될지도 모르겠네요.
      ‘고통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 네. 동물과 식물 간에도 차이가 있고 같은 개체에게 행해지는 고통도 (상황의 위급함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없이 죽이는 게 인간에게 더 바람직한가’ – 예
      ‘고통없이 죽이는 게 동물에게 더 바람직한가’ – 아니오에 가까움
      ‘고통없이 죽이는 게 식물에게 더 바람직한가’ – 아니오에 가까움
      ‘동물이든 식물이든 죽이지 않는 게 (전체적으로) 더 바람직한가’ – 예
      ‘동물이든 식물이든 죽이지 않는 게 인간에게 더 바람직한가’ – 글쎄요
      ‘동물이든 식물이든 고통없이 죽이는 게 필수적인가’ – 아니오
      ‘식물도 고통없이 죽일래?’
      –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필요하다면 고통없이 죽이는 것보다도, 제가 나열한 방법(이삭줍기, 열매먹기)을 사용하면 죽음 없이도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 문제냐 생명이 문제냐’ – 생명
      ‘생명을 빼앗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고통을 줄이는 게 바람직하지 않느냐’
      – 생명을 빼앗는 것은 필수적이지 않습니다(이삭/열매 섭취). 효율과 비용의 문제이지요.

      ‘왜 극단적으로 인간 중심적인 윤리관을 갖게 되었나’
      – 윤리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에게만 주어진 (인간이라는 종끼리 만들어내어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의사 소통이 가능하고 협의를 이룰 수 있는 다른 종이 있다면(외계인? 심해인?) 전 그들과도 윤리에 대해 새로이 협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일반 동식물들과 그리 교감하지 않는데, 애완동물과 형성하는 애착관계는 자동차나 인형과 형성하는 애착관계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 윤리관을 인종 차별주의에 비유하는 것은 무리한 일반화이며 모욕적이군요. ‘인종’이라는 표현을 쓰셨으니 ‘인종’의 정의가 무엇인지 묻고 싶군요. 저는 ‘인종’이라는 표현은 별로 쓰고 싶지 않은데, ‘인종’이라는 단어 자체가 보이는 형질 차이에 따라 인류를 임의로 구분한 기준으로서, 인종차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소위 각 ‘인종’ 간에는 인간으로서의 근본적인 차이(무엇인지 굳이 설명해드려야 하나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알려진 인류학적 이론을 근거로 얘기하자면 소위 ‘인종’이라는 것이 나타내는 것은 단지 직계 조상들의 생활 근거지가 어느 위치들이었는가에 대한 분포에 불과하며, 각 인간은 백인/흑인 따위로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70%, 아메리카에서 25%, 유라시아에서 5% 따위의 실수 분포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과 생명의 중요도가 차이남을 다시금 느끼게 되는데, 한가지 사고 실험을 해 보죠.

      전쟁터에서 적군을 다 물리치긴 했으나 우리편 생존자는 둘 입니다. 나, 친구. 둘다 부상이 심하고 부상당한 군마가 한마리 더 있습니다. 나는 움직일 수는 있는데 친구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형편이고 친구는 움직일 수도 없는 형편이며 말은 물론 못 데려갑니다. 상황을 보니 친구도 말도 두어 시간 정도 (극심한 고통 가운데) 버틸 수 있을 것 같고 내가 열심히 움직이면 네 시간 정도 후에 아군 진지에 도착해서 다섯 시간이 경과하기 전에는 돌아와서 친구를 데리고 치료 조치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물론 아주 희박한 가능성으로 도중에 정찰 중인 아군을 만나면 세 시간 안에도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도 그 가능성은 고려조차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런 경우 보편적인 선택은?
      – 말은 머리나 심장을 쏴서 죽이고 친구는 그대로 두고 열심히 뛴다.
      tracer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키히 143.***.138.186

      마지막 사고 실험은 사실 답이 없는 문제로서,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는 ‘안락사’와 관련된 것이라, 정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고통이나 생명에 대한 감을 다른 측면에서 느껴보시라고 낸 문제입니다. 저는 이러한 경우에 동물이나 인간에 대해 적용되는 고통/생명의 선택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tracer님은 어떠신지?

    • tracer 68.***.184.134

      자세히 설명해 주신대로 인종이라는 개념이 사실 무의미하다는 것이 과학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인종차별이 옳지 않다라는 윤리관을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동물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에 어떤 근거를 가지고 계신가해서 여쭈어 본 것입니다. 만일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합당한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종” 차별주의도 똑같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리한 일반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안해온 것 뿐이지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주장도 처음엔 무리한 일반화로 받아들여 졌으리라 생각합니다.

      동물이 우리와 윤리/도덕적인 교감을 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interest가 있습니다. 그들의 interest를 무시하고 우리의 작은 기호를 위해 deprive하는 것이 우리의 윤리와 상관이 없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동물에게 고통이 있으나 없으나 똑같다고 하시는 것은 결국 개를 안락사시키나 때려잡으나 똑같다고 보시는 것이네요.


      사고실험에 대한 제 의견:

      친구는 조금이라도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열심히 뛴다.
      이 경우 말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므로(다녀 올때까지 살아 있더라도, 전쟁시 제한된 보급 물자를 동물에게까지 사용하기는 힘들어 보이므로), 안락사시킨다.
      같은 답이네요. 저도 위에 말씀드린대로 인간과 동물에 대한 윤리관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tracer 198.***.38.59

      키히님의 마지막 댓글을 다시 읽어보고 질문이 생겼습니다.

      1. 고통없이 동물을 죽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에 가깝게 생각하신다고 하셨는데, 고통을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에 가깝다는 뜻은 아니시죠? 고통을 줘서 죽이나 안줘서 죽이나 어짜피 죽는 동물에게 큰 상관은 없다라는 뜻인가요?

      2. 동물이든 식물이든 죽이지 않는게 전체적으로 더 바람직하다고 하셨는데 전체는 무엇을 의미하시나요? 인간, 동물, 식물 전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만일 그 전체가 인간을 포함하는 거라면, 동/식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 인간에게 바람직한가에 대한 답이 글쎄요라고 나올 수 있나요?

      열매와 과실만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fruitarian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제 생각에 그게 불가능은 아닐지라도 개인의 건강을 정상적으로 보존하는데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윤리라는 것도 일단 우리가 생존의 필수적인 것을 reasonable한 범위 내에서 충족시킨 다음에 생각해야겠죠.

    • tracer 198.***.38.59

      위에 사고실험에 하나 더 덧붙이고 싶네요,

      – 친구에게 총을 주고 간다.

    • 키히 143.***.138.186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1번. 동식물의 입장에서 (고통을 당하고 죽는 것)<(고통없이 죽는 것)<<<<<(안 죽는 것)
      둘다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한 말입니다. 논리 전개의 순서상 그 뒤에 있는 말을 보태기 위해 “비교적” 아니오에 가깝다고 한 것이죠.

      2번. 전체=동물+식물+인간. 동식물을 죽이지 않고 fruitarian으로 사는 게 인간의 영양상태, 행복도, 생존확률에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글쎄요 라고 답한 것입니다.

      3번. ‘생존의 필수적인 것을 적절한 범위 내에서 충족’하는게 과연 가능할까요? 행복할수록 오래 살고 영양 균형이 잘 맞아야 수명이 연장되는 것을 고려할 때,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인데 ‘자신의 생명을 5% 깎고 대신 동식물의 희생을 절반으로 줄이겠어..’라는 결정을 할 사람이 있을까요? ‘자기가 챙길 것 다 챙기고 나서 남을 돌아보는 것’은 보통 윤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즉, ‘생존의 필수적인 것’이 사람들마다 다 다를텐데, (생명,종,고통 등을 고려한)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기준 없이 ‘나는 여기까지는 필요하니까 이걸 위해 타생명체를 희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이정도로 내 윤리관을 정하면 나는 도덕적으로 살고 있는 거야’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적절한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tracer님은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크게 보고 여타 동물과 인간 종의 차이는 작게 보시는데, 저는 동물과 식물의 차이보다 여타 동식물과 인간 종의 차이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유로 대화가 계속 겉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윤리든 도덕이든 지성을 가진 개체들의 모임에만 적용이 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상해하거나 살해하는 것에 벌을 주는 것은 우리들은 서로 상해/살해하지 말자는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규칙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음의 위협을 덜고 평안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죠. 호랑이가 다른 호랑이를 상처입혔다거나 토끼를 잡아 먹었다고 해서 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동물계에는 인간의 윤리관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들에게만 적용되는 윤리관을 주체는 인간으로 두고 객체만 (모든 생명체도 아니고) 동물로 바꿔서 적용하려 하십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채식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윤리관은, ‘채식은 도덕적이고 육식은 비도덕적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희생은 주체와 객체에 상관없이 항상 악하다’라는 간단한 명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두면 식물은 가장 덜 악하고 초식 동물은 조금 악하고 육식 동물은 많이 악하고 인간은 가장 악하죠. 즉, 먹이 사슬의 꼭대기부터 최악->무악으로 간다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이렇게 두면 불교의 ‘업’과 가까워지는 것 같은데, 인간은 생명을 위한 섭취에서 쌓는 악 이외에 단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옷 지어 입기, 책 발행, 밤에 티비 보기) 죽이는 생명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훨씬훨씬 악한 존재인 것이죠.

      뭐 그래서 전 채식주의자들이 자신의 윤리관에 의해 채식을 선택했다면 마땅히 끊임없이 생명의 희생에 대한 의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윤리관과는 어긋난 행동을 하고 있음을 계속 인식하면서 최소한의 희생을 치르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채식을 함으로써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반면, 저는 ‘모든 생명의 희생에 악이 있다’거나 ‘고통을 주는 것에 악이 있다’라는 윤리관을 갖지 않고 있으며, 다만 ‘윤리가 적용되는 객체는 그 윤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인류*로 한정된다’라는 윤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식이 제 윤리관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국가 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 사는 인류도 동등하게 취급받아야 하기 때문에 전쟁은 반대하는 편이며, 현세대의 인류 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인류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환경 파괴는 되도록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잔인한 도살/사육 형태는 인류의 심성에 파괴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극단적인 윤리관을 말씀드렸는데, 제 생각엔 스스로 모순이 없는 윤리관은 그렇게 두 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중간에 위치한 듯한 tracer님의 윤리관의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서 식물의 고통이라던지 안락사라던지 하는 얘기들을 꺼낸 것입니다.

      * 친구도 군인이라 총은 이미 갖고 있을 겁니다. 그 말씀을 하신 것은 ‘인간에겐 원하는 때에 자신의 생명을 중단시킬 권리가 있다’는 안락사 논쟁의 한 측 주장을 지지하시는 의미에서 하신 것이죠?

      * 며칠간 여기에 방문하지 못하여 답을 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섭섭해하지 마시길 ;)

    • 키히 143.***.138.186

      아.. 제가 생각하는 ‘윤리’라는 것은 ‘계약’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렇게 써 놓으면 용어가 다분히 기독교적이지만, 뭐.. 종교적인 면을 배제하고서라도 인본주의적인 연구자들 중에서 윤리를 ‘사람 간의 계약/협의’로 보는 류는 꽤 많습니다.

      반면 반대편 극단으로 들어 놓은 윤리관(불교적 윤리관?)은 우주를 지배하는 ‘마땅한 도리’에 가까운 측면인데요, tracer님은 supernatural logos를 부정하는 입장이시니 저쪽으론 안 맞으실 것 같고.. 기분이 좀 나쁘시더라도 제 쪽으로 오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쪽으로 오시면 종교적인 ‘신對인간의 계약설’ 이외에도 다분히 비종교적인 홉스/루크/루소의 ‘사회계약설’ 등이 있으니 그나마 만족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tracer 68.***.184.134

      잘 들었습니다, 키히님은 나름대로 일관성을 가지고 계신 것은 같은데, 제가 보기엔 육식과 채식은 둘다 생명을 빼앗는 것이므로 윤리적으로 차이가 없다라는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제가 틀릴 수도 있지만, 제가 한 때 그런식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해서 그런지 그런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동물을 객체로 윤리를 적용하지 않으신다면, 이유없이 고양이 머리를 짓밟아서 화제가 된 그 중국 여성은 윤리적으로 전혀 비난하지 않으시겠네요? 맞나요?

      말씀하신대로 저는 동물과 식물의 차이가 인간과 짐승의 차이보다 훠얼씬 크다고 생각합니다. 척추동물군에 함께 속하는 짐승/인간들이 식물들과 evolutionary tree of life에서 찾아봐도 아마 아주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동식물과 인간의 차이가 훨씬 크다는 의견에 어떤 근거를 가지고 계신가요?

      키히님이 가지고 계신 두가지 완벽한 모순없는 양극의 윤리관만 바라보시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양극단으로만 선택을 한정하심으로써 원하지 않으시는 결론을 피해나가시는 것 같네요.

      기본적인 윤리관이 다르니 더 이상 이야기는 진전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완벽한 윤리관에 못맞추느니 그냥 무시하고 살자.. 보다는, 내가 완벽하게 논리에 내 행위를 맞추지 못하더라도, 또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라도 내 행위가 결과적으로 다른 개체에게 조금이라도 더 이익이 된다면 그 일을 행하겠습니다.

    • 키히 143.***.138.186

      헷. 빠른 답변이군요. 가기 전에 한마디 더 올리고 가겠습니다.

      저는 ‘완벽한 윤리관에 못 맞추느니 무시하고 살자’라는 게 아닙니다. 이분법도 아니고 흑백논리도 아닙니다. 제가 생각해 본 모순없는 윤리관이 두 가지일 뿐이지요. 그리고 ‘채식=선,육식=악’ 주장은 새로운 측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저쪽이 심리적으로 끌리는데 그건 이루지 못하고, 이쪽도 인정하지 못한 채 그 가운데 머무른 자기합리화일 뿐입니다.

      제가 가진 윤리관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모순이 없고, 그 윤리관에 따르자면 육식과 채식 어느 쪽도 악이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윤리는 서로간의 협의에 불과하기 때문에 협의가 안되는 상대와는 윤리를 따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편 윤리관도 완벽하고 모순이 없고, 그 윤리관에 따르자면 육식도 업을 쌓고 채식도 업을 쌓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식물, 미생물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하고, 따라서 포식행위를 통해 생명을 빼앗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중간에 있는 윤리관은 육식은 악이고 채식은 악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게 이야기할만한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일단, 생명을 기준으로 하면 둘다 생명을 빼앗습니다. 식물의 생명이 동물의 생명보다 하급하다고 주장하시는 것입니까? 그다음 고통을 기준으로 하자면, 첫째. 고통의 정의가 불명확합니다. 저는 (정의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봅니다. 둘째. 식물은 고통을 크게 느끼지 않고 동물은 고통을 크게 느끼기 때문에 동물을 죽이는 것이 더 나쁘다고 생각하신다면 동물도 식물이 느끼는 고통 정도로 죽이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생각해보겠습니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은 악입니까 아닙니까?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윤리관에서는 악일 것입니다.
      제 윤리관에서는 윤리는 주체와 대상이 모두 인간이어야 하므로 악이 아닙니다. (윤리의 적용 대상이 아닙니다.)
      tracer님의 윤리관에서는 어떻습니까?

    • tracer 68.***.184.134

      제가 여러번 언급했는데, 저는 윤리/비윤리 두가지로 단적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좀 더 윤리적인 행위가 있고 덜 윤리적인 행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식이 채식보다 이 세상에 조금 더 악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은 토끼에게 악입니다. 도망가는 영양을 가까스로 사로잡아 아사를 면하는 치타에게 사냥의 성공은 선입니다. 사람이 번개를 맞는 일은 사람에게 있어서 악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데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필요없는 악들이 있습니다. 그런 필요없는 악들을 자행하는 행위는 덜 윤리적인 행위이고 좀 더 나아가서는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수도 있는 행위라는 생각입니다.

      제 질문에 답을 안하셨습니다.

      1. 동식물과 인간의 차이를 훨씬 크게 보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2. 동물을 윤리의 객체로 보지 않으신다면 이유없이 주인없는 개의 다리를 자르는 행위(죽이지 않고 고통만 주는)는 윤리적으로 비난받아야 합니까?

      출발하시기 전에 읽으시면 좋겠네요.

    • 키히 143.***.138.186

      윤리 적용 문제를 다양화시켜 보지요.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악이 아닌지 구분해 보십시오. 또한 구분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예로 든 두 윤리관은 모든 케이스에 대해 명확히 구분 가능합니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
      사람이 토끼를 잡아먹는 것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
      토끼가 풀을 뜯어 먹는 것
      토끼가 열매를 먹는 것
      사람이 풀을 뜯어 먹는 것
      사람이 열매를 먹는 것
      사람이 열매의 씨앗을 씹어 먹는 것
      독버섯이 자기를 먹으려는 토끼를 죽게 한 것
      독버섯이 자기를 먹으려는 사람을 죽게 한 것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죽게 한 것

    • tracer 68.***.184.134

      저에게 있어서 선(good)은 happiness and pleasure(단순한 쾌락이 아님)입니다. 악(evil)은 pain, suffering and unwanted death입니다.
      이 점에서,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 –> 호랑이는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하므로 호랑이에게는 선이고 토끼에게는 악입니다.

      사람이 토끼를 잡아먹는 것 –> 사람이 꼭 토끼를 먹었어야 하느냐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 –> 호랑이에게 선, 사람에게 악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 –> 역시 꼭 사람을 먹었어야 했다면 먹은 사람에게 선, 먹힌 사람에게 악

      토끼가 풀을 뜯어 먹는 것 –> 토끼에게 선, 풀에게 악

      토끼가 열매를 먹는 것 –> 토끼에게 선, 열매에게도 선(씨를 퍼뜨릴 수 있으므로)

      사람이 풀을 뜯어 먹는 것 –> 꼭 먹어야 했다면 사람에게 선, 풀에게 악

      사람이 열매를 먹는 것 –> 둘 다 선

      사람이 열매의 씨앗을 씹어 먹는 것 –> 사람에게는 ?? 열매에게 악

      독버섯이 자기를 먹으려는 토끼를 죽게 한 것 –> 이건 잘 모르겠습니다. 독의 존재 이유를 제가 잘 모르는 관계로, 토끼에게 악

      독버섯이 자기를 먹으려는 사람을 죽게 한 것 –> 위와 마찬가지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죽게 한 것 –> 정당방위면 죽인자에게 선, 의도적인 살인이면 악, 죽음을 당한 자에겐 악

    • 키히 143.***.138.186

      답을 하였습니다. 아마 두세번씩 한 것 같은데, 읽고 싶지 않으셨나 봅니다.

      1. ‘윤리’라는 것이 ‘서로 협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식물과는 협의가 되지 않습니다.

      2. 주인없는 개의 다리를 자르는 행위라.. 재미를 위해 자른다면 인간의 잔인성을 키우는 것이므로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악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스스로를 악인에 가까운 성향으로 바꾸는 것이지요. 실험을 위해 자른다면 어느정도 인간에게 유익을 끼치는 선한 행동이겠지요. 썩어들어가는 다리를 치료를 위해 자른다면 개에게 유익을 끼치는 행위겠지요. 이 경우는 스스로를 선인의 성향에 가까운 쪽으로 끌고 가는 선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인없는 다친 개의 치료에 많은 돈을 써서 살리느니 고아들에게 식량을 보내겠습니다. 단, 주인 있는 개라면 주인이 그 개에게 감정이입이 되어있는 상황이므로 개를 잃는 슬픔이 주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개를 치료하는 것에 찬성합니다.

      *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이 ‘토끼에게 악’이라는 문장은 좀 충격적인데요.. 저는 지금까지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윤리라는 것은 그것을 구분짓는 잣대이지요) tracer님은 윤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 않으시고 전적으로 ‘good effect’와 ‘bad effect’라는 utilitarian의 관점에서만 말씀하시고 계셨군요. 저는 선한 행위 악한 행위 얘기가 나오길래 윤리에도 관심은 조금 있으신가보다 하셨는데, 진작에 ‘저는 윤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효용을 올립시다’라고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단, 윤리를 도입하지 않는다면 효용을 왜 올려야 하는 데 대한 정당성을 어떻게 주장하시렵니까?

      윤리는 ‘호랑이의 악한 행위’에 관심이 있지 ‘토끼에게 벌어진 나쁜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번개를 맞은 것에는 어떤 악한 행위도 없습니다. 다만 주변 사람들에게 악영향이 있을 뿐이지요. 따라서 번개를 맞지 않도록 피뢰침을 세우는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선한 행동이지만, 누가 번개를 맞은 일이 있다고 해서 어떤 악이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 tracer 68.***.184.134

      아, 독버섯 문제 생각났습니다.

      독의 성공적인 효과가 natural selection을 통해 자기 gene의 생존에 이익을 줄 것이므로 큰 의미에서 선(토끼들이 점차적으로 그 독버섯을 피할 것이므로) 해당 버섯 객체에게는 악, 토끼에게는 악

      사람의 경우도 독버섯에게는 선, 사람에게는 악

    • tracer 68.***.184.134

      1. 제 질문은 윤리가 아니라 “차이”를 두신 데에 대한 근거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왜 사람과 동물의 차이가 동물과 식물과의 차이보다 크다고 보십니까?

      제가 분명히 저는 utilitarian 관점이라는 말씀을 드렸고,
      utilitarian view도 윤리적 행위의 guide가 되는 ethical philosophy에 속합니다.

    • tracer 68.***.184.134

      즉, utilitarian관점에서 필요없는 악을 초래하는 행위는 악한 행위입니다.

      다시 문제에 답해야겠네요.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 –> 선악 행위 없음
      사람이 토끼를 잡아먹는 것 –>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먹었다면 선악 판단 불가, 식물성 영양분 섭취가 가능했다면 악한 행위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 –> 선악없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 –> 상대방의 동의가 없었다면 악한 행위
      토끼가 풀을 뜯어 먹는 것–> 선악 없음
      토끼가 열매를 먹는 것–> 선악 없음
      사람이 풀을 뜯어 먹는 것–> 선악 없음
      사람이 열매를 먹는 것–> 선악 없음
      사람이 열매의 씨앗을 씹어 먹는 것 –> 악한 행위이나 굉장히 사소함
      독버섯이 자기를 먹으려는 토끼를 죽게 한 것 –> 선악없음
      독버섯이 자기를 먹으려는 사람을 죽게 한 것–> 선악 없음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죽게 한 것–> 선악 없음

    • 키히 143.***.138.186

      으음.. 그런 입장이라면, virtue/vice(선악) 대신에 positive/negative(긍정적효과/부정적효과)라는 표현을 쓰셨으면 오해가 없을 뻔 했군요. 선악은 행동에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짓는 종류의 윤리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1에 대한 답은 계속 드리는데, tracer님은 듣고 싶으신 것만 들으시네요. 그 ‘차이’라는 게 무엇에 대한 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tracer님은 유전적 차이를 자꾸 강조하시는데, 저는 ‘윤리의 적용 대상으로서의 차이’를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어쨌든 tracer님께선 선악과는 무관하시니 굳이 채식이든 육식이든 죄책감을 가지시거나 어떤 기준을 세워놓고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tracer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계산할 수 있는 한 가장 높은 효용을 얻는’ 채식과 육식의 중간단계를 선택하시고, 그것이 최적임에 만족하시면 될 겁니다.

    • 키히 143.***.138.186

      utilitarian의 관점이라..
      효용을 올리는 것은 선이고 내리는 것은 악이겠지요?
      혹은 설마 효용을 최대로 하는 행위가 선이고 그 외에는 다 악인 건가요?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이 육식을 하는 것이 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육식으로 얻는 효용(영양분+행복감)]-[동물이 잃는 효용(생명+고통)]
      < [채식으로 얻는 효용] – [식물이 잃는 효용(생명+고통)]
      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키히 143.***.138.186

      “필요없는 악”이라는 표현보다는 “필요없는 부정적효과”라는 표현을 쓰시길 부탁드립니다. 행위에 붙는 악이라는 표현이 효용에 붙으니 자꾸 헷갈리네요.

    • tracer 68.***.184.134

      필요없는 고통이나 죽음 이라고 사용하겠습니다.

      그럼 동식물과 인간의 주된 차이가 윤리적 협의라면, 상호간에 윤리적 협의가 불가능할 정도로 지능이 극히 낮은 인간은 동물과 같다고 보시나요?

      [육식으로 얻는 효용(영양분+행복감)]-[동물이 잃는 효용(생명+고통)]
      < [채식으로 얻는 효용] – [식물이 잃는 효용(생명+고통)]
      이라고 결론지은 근거를 이전에 다 말씀드렸습니다.

      1. 식물의 고통은 두뇌와 복잡한 신경체제가 없으므로 동물의 고통보다 낮다고 생각한다.

      2. 채식과 육식 모두 필수적인 영양분 섭취는 똑같다.

      그러므로, 결국 비교는 우리의 만족감이 더 중요하냐, 동물의 고통이 더 중요하냐. 이렇게 남는 것이고, 저는 우리의 만족감은 동물의 고통에 비하면 사소하다. 이렇게 결론 지은 것입니다.

      부등호가 반대로 될 거라는 주장에 대한 적절한 근거는 별로 없어보이구요.

    • 키히 143.***.138.186

      저는 동물을 즉사시키면 고통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부등호를 반대로 하겠습니다.

    • 키히 143.***.138.186

      으음.. 왠지.. 또다시 tracer님이 알고 계시면서 모른척하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차이’는 ‘협의된 윤리의 주체+대상이냐 아니냐 하는 여부’입니다.
      그 여부 구분은 두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으음.. 제가 좀 이중인격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데, 이건 다 secularist인 tracer 님 때문입니다 (^^). 한쪽 측면으로는 만족하시지 않을테니.

      저에게 있어서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영혼의 유무’입니다. 그래서 지능이 낮은 사람이라도 영혼이 있으므로 마땅히 동식물과 다른 취급을 받아야 합니다. (이부분의 논리전개는 서로 더이상 하지 않도록 하죠)

      이 대답으로 만족하시지 않을테니 다른 측면의 대답을 해 보죠. ‘윤리적으로 협의가 불가능하게 지능이 낮은 사람의 경우도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자’라는 협의가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협의가 이미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일반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정당화됩니다. 저도 tracer님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해 드리고 싶지만 이 측면은 깊게 생각해보지도 않아서 달리 도리가 없네요.

      그런 협의가 이뤄진 것은 여러가지 측면이 있는데, 일단 종교적인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utilitarian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은 생성하는 효용이 항상 negative이므로 없는 편이 유익할 텐데 말이죠. 더불어 종교계의 영향으로 태아도 사람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낙태는 금지인 나라가 많습니다. 종교의 영향을 배제하고 싶다면, ‘잔인하게 동물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선한 인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 아닐까 싶네요.

      사실, ‘지능이 현저히 낮은 자’에 대해서는 법률적으로 이중 잣대를 대고 있는 현실입니다. 즉, 주체로서의 윤리는 적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대상으로서의 윤리는 엄격히 적용합니다 (죄를 지어도 봐주지만 누군가 이사람을 때리면 더 벌을 크게 내리죠).

    • tracer 68.***.184.134

      예 잘 알겠습니다. 인간도 진화된 동물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philosophical naturalist에 가까운 저와 영혼과 지구상의 동식물을 다스리기 위해 창조된 영혼을 가진 인간을 믿으시는 키히님과 이 문제에서 의견을 좁히기는 어렵겠네요. 결국 종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이 참 흥미롭네요.

      peter singer와 같이 극단적인 utilitarian의 경우는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현저하게 갖추지 못한 장애인을 동물보다 낮게 보기도 하더군요. 저는 그 정도까지의 fundamental consequentialist는 못됩니다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utilitarian의 관점이 회색지대가 많은 현대사회에 굉장히 유용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중 잣대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은 해당 법률의 윤리관이 결과와 효용 뿐 아니라 행위의 의도에도 중요성을 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인에도 일급, 이급, manslaughter로 등급을 나누듯이 말이죠.

      많이 배웠습니다. 언어를 사용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새삼 느꼈구요. 여행가시는 것이면 즐거운 여행 되세요.

    • 키히 143.***.138.186

      예.. 제가 utilitarian에 대해 잘 몰랐던 이유로 대화가 겉돈 경향이 있는 것 같네요.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