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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er님 다시 만나는군요. 반갑습니다 ^^
일단, 제가 좀 까탈스럽게 군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윤리적’이라는 표현은 ‘윤리’가 정의되지 않으면 논할 수 없는 문제이니까 저는 앞으로 ‘합리적’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이야길 해 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육식을 도덕적으로 금하지만, 많은 종교에서는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불자가 아니라 먹기 위해서 동물을 죽이는 것은 거리낌이 없지만, 재미로 동물을 죽이는 건 좀 안좋은 기분이고, 물건을 훔치는 게 죄책감이 가장 크군요. 그러고보면 저의 윤리관은 생태계보다는 인간 사회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네요.)
그리고, 저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라서 의견이 편향될 수 있으며, 이 글에서는 되도록 객관적인 팩트를 (다소 편향적일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나열해 보는 게 목적이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저는 (건강을 위해서건 윤리를 위해서건) 채식주의로 결정한 사람들을 비웃지도 않으며 존경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단지, ‘저는 채식주의자인데 생선은 먹어요’라고 말하는 (채식주의의 뜻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만 약간 비웃습니다 (이 경우 어식과 채식을 해요 라고 해야 하나..).
일단, 베지테리언과 카니보어의 차이를 몇가지 정리한 게 있는데,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spoonrevolution.com/reason.php?reason_type=health
보면,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Dr. William Collins’로 시작하는 문장 근처에 있습니다: 육식 동물은 콜레스테롤 소화 능력이 무한대에 가까운데, 초식동물은 아니더라. 건강을 생각한다면 육식보단 채식이 더 좋은 선택이라는 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이지요. 그 얘기는, 우리 신체가 육식보다는 채식에 맞게 가꾸어져 있다는 근거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기적으로만 생각하더라도 건강을 중심으로 고려하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육식보단 채식인 것이겠지요.‘고통’ 역시 정의하기 나름인데, 고통을 신경 물질의 전달 및 그에 따른 신체 반응으로 정의한다면, 식물 역시 그에 준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면, 잔디를 깎으면 풀냄새가 그윽하게 퍼지는데, 그건 바로 증발한 수액입니다. 수액은 식물이 상처를 입었을 때 발생시키는 물질이며, 수액이 퍼지면 주변 식물들이 그에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니 눈에 보이는 반응은 없습니다만..) 특히 잎에 독이 있는 식물이 많으며 씨앗에는 치명적인 독성분이 있는 식물(은행/살구/사과 등)이 많다는 것을 보면 식물 역시 잡아먹히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은 적어도 눈에 보이는 정도의 큰 생물들에서는 명백하죠. 순환계가 제대로 동작하고 세포들이 그 순환 활동에 참여하면 살아있는 것이고, 생명 상태를 중단시키는 행동이 살생이죠.
“사람의 눈에 보이는 정도의 큰” 생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생명을 중단시키지도 않는 것을 윤리로 정의한다면 채식도 이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모든’ 생물을 대상으로 하면 세균도 죽여서는 안되니 손도 씻어서는 안될테니 눈에 보이는 생물로 제한했습니다). 다만 채식은 이러한 가혹한 조건에서도 육식과 다르게 윤리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의 손톱, 발톱, 머리카락 처럼 식물에게도 순환기관이 연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바로 종자입니다.
즉, 거대 생물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고 생명을 빼앗고 싶지도 않은 마음에 채식주의로 결정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은 과실이나 곡식 등을 섭취하는 방법입니다. 단, 이 경우에도 곡식이라면 석기시대 이후로 개발된 탈곡 방식들은 모두 식물을 죽인 다음 효율적으로 종자를 털어내는 방식이니 사용하면 안되고, 이삭줍기와 같은 방식으로 추수를 해야만 하겠지요. 그리고 과일들은 익어서 떨어진 다음에 섭취하면 되구요. 그리고 배아는 먹고 씨앗은 꼭 땅에 심어주어야 합니다. (으음.. 어쩌면 곡식을 먹는 건 안 될지도 모르겠군요. 배아를 제거하면 싹이 나지 않으니..)
문제는 뿌리채소 및 줄기채소를 섭취하지 않고, 각종 열매 채소(토마토, 수박 등)들 및 과일과 곡식만으로 영양소를 다 채울 수 있냐는 점인데, 잘은 모르겠지만 식물의 종류가 다양하므로 아마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
중간에 ‘알약’으로 영양소를 섭취하는 얘기가 나왔는데, 원글에서처럼 ‘부족한 몇몇 영양소를 보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느 댓글에서처럼 ‘모든 영양소를 알약으로 섭취’하는 것은 아마 상당히 어려운 일일 겁니다. 식품에는 아직 신체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려지지 않은 ‘미량원소’들이 존재하고, 이들을 제거했을 때 영양 결핍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해당 미량원소들을 모두 밝혀내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요. 비타민 C조차 바다항해 중 괴혈병을 앓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성분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결국 이러한 연구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해보면 그 결과물은 기아 상태의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힘들테고, 그냥 라면 한박스씩 보내는 게 훨씬 효율적일 겁니다 (라면 스프엔 돼지고기가 들어가므로 채식이 아님에 유의).
효용면에서 생각해보면, 확실히 육식은 비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식용가축들이 먹어치우는 식량이 전체 생산량의 1/3이나 된다고 하죠.. 소들을 키우기 위한 목초 경작지에서 곡식을 재배하면 10억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라고 하네요. 식량 수급이 좋지 않던 시절에는 영양소가 농축되어 있는 동물들이 좋은 영양 공급원으로 기능하여 가축으로 기르기 시작했지만, 각종 식품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는 굳이 비효율적인 육식을 지속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거론한 효용 문제는 결국 윤리 문제로도 돌아오게 되는데 (이 부분은 인간사회에 적용되는 것이라 보편적인 윤리관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단편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먹는 소를 먹이기 위해서 키운 곡식들을 인간이 먹었다면 내가 먹고나서 기아로 허덕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았을 텐데 하는 양심의 문제 때문입니다. 물론, 이 상상은 매우 단편적인 것으로서, 어차피 목초 생산지는 기아 발생지와 대체로 멀고, 자본주의 체제를 고려했을 때 소를 사육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땅에서 기아민들을 위한 곡물을 생산하고 먼곳으로 수송하면서도 헐값에 판매할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즉, 가축의 사육을 중지한다면 식량의 여분이 기아민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식량 생산이 2/3으로 줄어드는 결과로 귀착되겠지요.
결론은?
제 생각은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일반적인 채식주의자가 육식자들을 윤리적인 면에서 비난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단계의 채식주의가 있을 수 있을 텐데, 극단으로 가면 과일만 먹고 피혁제품도 금지하는 근본주의적 생명본위주의자가 있을 수 있고, 가장 물렁하게 가면 우유, 계란까지는 먹는 건강식 채식주의자가 있을 수 있겠죠. 참고로 대체로 제가 아는 보편적 채식주의자(동물성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는 류의)들은 자기수양에 가까운 분위기라서 남들을 비난하거나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함께 먹는 자리에서 자신은 채식을 하지만 남들이 육식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지도 않았구요. 채식주의자보다 오히려 육식자들이 타인의 식취향에 대해 윤리적인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아요. (푸아그라를 먹는 프랑스인이 한국의 개고기를 비윤리적이라 욕하는 등의..)같은 의미에서 육식자들이 채식주의자들을 비웃을 근거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서로다른 자신만의 기준 및 취향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모순된 기준이라면 맘껏 비웃어줘도 될 테고 (생명을 사랑해서 채식주의자인데 생선은 먹는..) 자신의 기준을 남에게 확대 적용하려 한다면 그때는 좋은 기분으로 대하기 힘들어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