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에 실렸던 ,최화숙, 이화여대 간호학 겸임교수 호스피스 책임자,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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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華淑 現(2000년3월) 京仁女大 精神간호학 겸 임교수·이화여대 호스피스 책임자

    <호스피스의歷史>
    호스피스(Hospice)의 어원은 라틴어의 Hospes(손님) 또는 Hospitum(손님접대,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에서 기원한다. 1900년 英國의 빈민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던「자비수녀회(Sisters of Charity of St. Vincent de Paul)」가 5년 뒤「성 요셉 호스피스(St. Joseph Hospice)」를 창설해 독립된 건물에서 임종환자를 돌보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현대적 의미의 호스피스는 영국인 여의사 시실리 손더슨이 1967년 성 크리스토포 호스피스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韓國은 1963년 강 원도 강릉에서「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수녀들에 의해 갈바리아 의원이 세워져 임종환자를 돌보기 시작한 것이 시초가 된다. 현재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병상 운영은 하지 않고 가정방문 호스피스를 시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강남 성모병원에서도 1982년부터 호스피스 활동이 시작되었고 1987년에는 성모병원과 강남 성모병원에서 10개의 호스피스 병동이 신설 운영되고 있다. 1988년에는 세브란스 암센터에서도 가정간호 호스피스 활동 프로그램을 시작했다(崔華淑 박사는 이때 미국인 선교사 출신의 왕매련 당시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교수와 함께 호스피스 팀을 창설했다).
    이화여대는 1992년 5월부터 가정호스피스 간호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한국에서 약60여 호스피스단체가 활동중이지만 의료보험등 제 도적 지원체계가 전무한 실정이어서 조직적인 활동을 시도하는 기관은 예상외로 적다.

    <한국의 호스피스 조직>
    후원자들의 후원금을 통해 팀별로 운영한다. 실무책임자(팀장)와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직자 및 자원봉사자(2∼3명)로 구성 된다. 이화여대 호스피스의 경우 3백여명이 교육을 받았고 이 중 50여명이 활동중이다. 호스피스 한 팀당 10명의 환자를 간호한다. 그 이상은 관리능력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환자당 평균 3∼6개월간 간호를 받으므로 연간 50명 이내의 末期환자를 간호할 수 있다. 비용은 형식적으로 연회비 2만원을 정해 두고 있지만 가난한 환자는 무료이다.

    ▣ 『선생님,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보이는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들이 달려가는 종착역은 어디일까? 호스피스 경험자로서, 또 하나의 다른 세계가 이런 현상들 속에서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 다. 이것은 영(靈)의 세계인데 보이지 않는 세계다. 인간이란 건강할 때는 보이는 세계에 치중하다가도 병이 들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생각하게 되는데 죽음에 임박한 말기환자들에게는 이 세계가 좀 더 분명해진다.

    1998년도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연 간 말기암(末期癌)으로 사망하는 사람의 수는 약 5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하루에 1백37.3명, 한 시간에 5.7명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평균 가족수가 4명임을 감안하면 매시간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임종(臨終) 하는 사람 곁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6개월 혹은 1년 이내에 생명을 마감해야 하는, 생명의 불길이 꺼져 가는 숱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관심사는 무엇일까? 돈일까? 명예나 출세일까? 수천만 원짜리 모피 코트일까? 13년간 호스피스 실무자로서 체 험한 바에 따르면 그런 것들은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사는 사람들의 관심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3년 동안 말기(末期)환자 및 그들의 가족과 함께 하면서 수백 명의 환우(患友)들을 먼저 보내고 그들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함께 지 켜본 사람이 한국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말기환자와 가족을 전인적(全人的)으로 도와주고 사별(死別) 후 유가족 관리까지 포함 하는 호스피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화여대(梨花女大)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면서였다.「입원환자의 영적(靈的) 간호 요구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호스피스에 대해 알게 되었고 석사학위를 받은 후 바로 이 일에 참여 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제목의 논문을 쓰게 된 것도 나름대로는 충격적인 경험이 있어서였다. 20여 년 전 이화여대부속 동대문병원에서 야간 근무 를 하던 중에 마주치게 된 한 환자가 있었다. 젊은 남자 환자였는데 폐렴으로 호흡곤란이 심한, 별로 상태가 좋지 않았던 환우(患友) 였다.

    병실을 돌면서 환자들이 잘 자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붙잡는 것이었다. 놀라서 돌아보니 바로 이 환자였 는데 심한 호흡곤란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떠듬떠듬 하는 말이『선생님,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습니까?』하는 것이었다. 무엇인가를 추 구하는 듯, 간절히 알고자 하는 열망이 깃들어 있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묻는 그 환자의 말에 순간 몹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아마도 이렇듯 숨이 가쁜 환자의 경우 의료인에게『선생님, 숨 좀 편안히 쉴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하리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환자에게는 신체적(身體的)인 요구뿐만 아니라 영적(靈的)인 요구도 함께 있음을 알게 되 었다.

    어쨌든 지난 13년 동안 가정호스피스간호를 하면서 집에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하였기에 서울시는 물론이고 경기도 미금시, 교문리, 과천, 안양, 성남, 부천 등 인근 지역에 이르기까지 길을 지나다 보면「저곳에는 ○○ 환우의 집이 있었지, 저기에 살던 환우(患友)는 어떠어떠했었지…」 하면서 거리와 골목마다 그들과 함께 하였던 경험들이 기억으로 남아 있어 운전하다가도 가끔씩 차를 세우고 회상 해 보곤 한다.

    ▣ 『예비적 우울(憂鬱)』
    S동을 지나다 보면 H부인의 경우가 특히 생각이 난다. 그녀는 사려 깊고 조용한 여성이었다. 오른쪽 유방암으로 수술 후 1년 동안 잘 지내다가 재발(再發)하여 항암(抗癌)치료를 하였는데 치료 후 3년 정도 건강하게 지내다가 재발하여 호스피스에 의뢰된 경우였다. 일 주일에 두 번 정도 이 환자를 방문하였는데 라포(Rapport-의료진과 환자와의 사이에 형성되는 신뢰관계·필자注)가 만들어지면서 H부 인은 낮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자신의 지나온 삶과 질병 경험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남편은 고위 공무원이었으며 자녀들도 다 자라서 막내가 대학생이었던 H부인은 6년 전 처음 암(癌)이라는 진단을 받고 이동식 침대에 누워 수술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하나님, 살려만 주신다면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하고 기도드렸고 그후 종교를 가지게 되 었다고 하였다.
    물론 수술 당시 그녀는 종교인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그 수술실 앞에 가기 전까지는 한 번도 하나님을 생각해 본 적도, 불러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동식 침대에 누워 곧 수술실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지나간 삶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 나님을 찾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모든 일을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인간이 노력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박봉인 남편의 월급을 가지고도 알뜰하게 살며 최선을 다해 자녀를 양육하는 등 나름대로는 열?살아왔으나 그 순간, 인생에서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절반밖에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재발하여 항암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는「아!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삼분의 일 정도밖에 안되는구나」하는 깨달음이 왔으며 성직자와 교우들이 방문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재발하여 완치를 위한 치료는 어렵 고 증상조절을 위한 호스피스 치료가 필요한 상태에 이르자「人生이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전부가 그분에 의해 서 되어지는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호스피스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두 달 정도 지나면서부터 H부인은「예비적 우울(憂鬱)」을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죽어가는 사람의 심 리상태를 연구했던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퀴블러 로스에 의하면「예비적 憂鬱」이란「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면서 미리 슬퍼하는 상태」이다. H부인 역시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알았으며 그것을 생각하며 슬퍼하였기에 감정은 한없이 낮아져서 말이 없 고 고요하였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 ” 利己的으로 살아온 삶이 후회스럽다”
    가끔씩 깊은 한숨을 쉬곤 했는데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소리로 천천히 이야기한 것은 『떨·어·지·는·저·낙·엽·을·내·가·다 ·시·볼·수·있·을·까·나·는·이·걸·생·각·해·봐·요』라는 것이었다.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모든 것이 다 생소해 보이고 「이게 마지막이구나. 지금 보는 것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심각해지고 진지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주 변을 살펴보며 문득 생경(生硬)스럽게 느껴지기도 해서 가만히 그것들을 음미하곤 했다. 그러면서 이제 서서히 다가오는, 곧 닥치게 될 자신의 떠남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세상과 다가올 세상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런 감정적 분위기는 삶의 일상적인 소란스러움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인데 환자는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 하면서 웃고 있으면 「저·게·뭐·이·저·렇·게·재·미·있·을·까?」 의아스러워진다고 하였다.

    한동안「예비적 우울 단계」에 머물러 있던 H부인은 어느 날 나에게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가만히 돌이켜보니 모두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이기적(利己的)으로 살아온 삶이요, 이웃과 국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서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하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서 자신이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고 하면서 장기(臟器) 기증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필요하면 시신(屍身) 전부라도 기증하고 싶으니 방법을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 다.

    가정호스피스 팀 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어졌고 먼저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그 다음으로 암환자의 장기가 이식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H부인에게 남편과 자녀들에게 자신의 이런 뜻을 직접 알리고 동의를 얻도록 하였으며 의사소통이 여의치 않으면 돕겠다고 하였다.

    한편으로 장기 기증 및 시신 기증에 대해 알아본 결과 암환자의 경우 각막이식만이 가능하며 시신기증은 의과대학생들의 해부학 실습 을 위해 쓰여진 후에 뼈를 보관하거나 정중하게 장례를 치러 드린다고 하였다. H부인은 기뻐하면서 이 두 가지를 다 하기 원하였으나 가족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갑작스런 H부인의 말에 가장 충격을 받은 이는 남편인 듯하였다. 자녀들은 울면서도 어머니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겠다고 하였으나 남편은 필자를 좀 만나자고 하였다. 호스피스 사무실로 찾아온 H 부인의 남편은 이 문제는 생각해 보지도, 상상해 보지도 않은 것이었 다고 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사실 장기기증을, 더구나 시신기증을 하고 싶다는 환자의 말을 듣고 그 방법을 알아보는 동안에 이 문제는 필자 자신에게도 많은 생각 을 하게 해주었다. 호스피스를 시작하고 나서 장기기증을 제안한 것은 H부인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는 필자 자신도 그 문 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갑작스레 환자가 꺼낸 화두(話頭)로 인해 내 가슴도 콩닥거리게 된 것이었다.

    필자인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게 되었다고 해서 내 몸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더구나 내 몸을 해부(解剖)하라고 내어주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해부학 실습실에서 보았던 사체(死體)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러한 화두(話頭)에 대해 필자 역시도 자신을 성찰(省察)하고 있던 중 이었다. 당시 함께 일하던 왕매련(Marian Kingsley) 교수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였다.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호스피 스 책임자를 겸하고 있었는데 이분의 경우 선교지인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 유서(遺書)와 함께 장기기증서에 서명을 하고 왔으며 안식 년(安息年)마다 그것을 검토하고 재서명해 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그때가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 경우였다.

    그래서 남편의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는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후 남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되물어 보았다. 남편은 몹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자신은 종교인도 아니고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없으나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 희망사항을 무조건 거절할 수가 없어서 고민이라는 것 이다.

    필자는 충분히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준 후 환자를 포함한 가족회의를 열어 의논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먼저 H부인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진심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말할 기회를 주고, 그 다음 나머지 가족이 한 사 람씩 자신들의 의견을 말한 후 의논해서 결정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집에 돌아간 H부인의 남편은 그날로 가족회의를 소집하였 다.

    당시 H부인의 상태는 이미 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죽기 2~3일 전에 도달하는 임종과정(臨終過程)을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본인 스스 로 원활한 장기이식을 위해 병원에 입원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기력(氣力)이 너무 떨어지기 전에 가족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의사 를 밝히도록 기회를 줄 필요가 있었다.

    가족회의에서 H부인은「인간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며 무의미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기 전에 처 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을 위해, 인류(人類)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한 번 해 보고 싶다고 하였다.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고 학생들의 해부학(解剖學) 실습을 통해 의학발전에 이바지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하면서 그렇게 된다면 기쁜 마 음으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부인이 떠나고 난 뒤 못 견디게 그리움을 느낄 때 산소(山所)마저 없으면 어디 가서 눈물을 흘리며 아 내 잃은 것을 슬퍼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시신기증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래서 H 부인도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하 여 각막(角膜)만 기증하고 시신은 기증하지 않기로 절충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죽음

    ▣ 아름다운 죽음
    가족회의에서 이렇게 결정이 내려진 후 바로 입원한 H부인은 이튿날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평화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안과(眼科) 팀이 즉시 각막(角膜)을 채취하여 H부인의 양쪽 각막은 다른 두 사람에게 각각 이식되어 계속해서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호스피스에 가입한 지 1백2일 만에 소천(召天:기독교에서 쓰이는 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하늘로 간다」는 뜻-편집자 注)한 그 녀가 남긴 것은 생전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어 기뻐하는 두 사람의 감사와 나도 우리 어머니처럼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살겠다는 자녀 들의 다짐, 그리고 그 아름다운 마음을 길이 기억하는 남편의 그리움이었다. 또한 H부인과 1백여 일을 함께 했던 시간들은 나에게도, 우리 호스피스 팀 전체에게도 인간의 몸이 갖는 의미와 장기기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호스피스 환자들에게서는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선(善)하게, 의미있게 살 것을 그랬다고 후 회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군인의 아내로서 B동에 살았던 W부인의 경우도 그랬다. 그녀는 전문대학을 졸업한 딸과 고등학생인 아 들을 둔 50대 여성이었는데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여행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라서 장군(將軍)인 남편이 은퇴하기만 기다리며 악 착같이 돈을 모았다. 많지 않은 남편의 월급으로 두 자녀를 키우며 땅을 사서 일꾼들을 독려하여 손수 아담한 2층 양옥집을 짓고 기본 적인 생활비 이외에는 한푼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에 합격한 시누이가 찾아와 입학금만 빌려달라고 울면서 간청했을 때도 거절하 였고, 심지어 월 일천원의 꽃동네 기부금조차도 아까워서 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막상 남편이 제대한 후 이제 막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볼까 하는 시점에 그 부인은 자궁(子宮)경부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많 은 사람들이「암(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죽음」이라는 단어를 연상하지만 사실 암환자의 5년 이상 생존율은 50%나 된다. 그 중에 서도 자궁경부암은 위암(胃癌), 유방암(乳房癌)과 함께 장기(長期) 생존율이 높은 부위의 암이다. 그러나 이 부인의 경우는 방사선 치 료와 항암 치료 모두 효과가 없었다.

    그녀는 진단 받은지 2개월 만에 완치불가(完治不可)에 잔여수명이 6개월 이내로 판정받고 호스피스에 의뢰됐다. 이 부인은 평소 자신의 건강도 꼼꼼히 챙기는 편이어서 6개월마다 자궁암 진단검사도 해 왔다고 한다. 진단받기 3개월 전에 한 검사에서도 “정상”이라는 응답 엽서를 받았는 데 생각지 않게 말기상태의 자궁경부암이라는 진단을 받아 몹시 상심한 상태에서 호스피스에 가입하였었다.

    어느 정도 감정(感情)의 파도가 지나간 다음에 W부인은 자신의 삶에 대해 한탄하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더 선하게 살 것을 그랬 다고 후회하는 말을 하였다. 인생이 이렇게 자신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날 문득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 줄 알았더라 면 좀더 주위 사람들에게 인간애(人間愛)를 베풀면서 선하게 살았어야 하는데 자신은 너무 못되게 살았다고 한숨을 쉬면서 거듭 말하 는 것이었다.

    ▣ 훌륭하게 生을 마감하는 데 있어 불필요한 것들
    자신은 오로지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서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개의치 않고 그것만을 목표로 돈을 모으고 또 모아왔 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너무 친척들의 마음에 못을 많이 박으며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여명(餘命)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認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돈도, 명예(名譽)도 출세(出世)도 쾌락(快樂)도 추구하지를 않는다. 이제 그런 것들은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지금 은 시간이 없고 그런 것들을 추구하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그들은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잘 죽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그들은 직감적으로 아는 것이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닌, 보이지는 않으나 엄연히 실재(實在)하는 세계를 의식하면서 벽돌을 쌓듯 삶 의 부분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잘 쌓아야 하는 것이리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걸맞게…

    인간에게 두 눈이 있는 것은 이 두 세계를 잘 보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건강할 때는 보이는 세계만을 더 잘 보고 그 세계가 다인 줄 알고 착각하며 산다. 그러나 육체의 기력이 쇠하고 삶의 여명(餘命)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특히 영혼이 육체體에서 빠져나가려고 할 때 그때에 이르러서야 한 눈으로는 이 세상을, 다른 한 눈으로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된다. 이때 옆에 있는 가족들조차 도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환자가 헛것을 본다고, 이상하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임종과정(臨終過程)을 겪고 있 는 환자에게는 실재(實在)인 것이다.
    임종단계에서 보이는 두 세계

    ▣ 임종(臨終)단계에서 보이는 두 세계
    골수염(骨髓炎)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였던 L군은 열일곱 살이었다. 15세인 중학교 3학년 때에 발병(發病)하여 열심히 치료하였으 나 폐와 뇌에 전이(轉移)되어 결국은 호스피스에 의뢰된 경우였다. 형과 어머니가 극진히 L군을 보살피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어느 날은 성직자와 함께 방문을 하였는데 호흡곤란이 심한 상태였다. 폐에 병소(病巢)가 있는 환자들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호흡곤란 이 심해지는데 산소(酸素)나 약을 사용해도 증상조절이 용이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애를 태우게 된다. L군 역시 처방된 약을 복용하고 있었으나 숨이 몹시 가쁜 상태였다. 거기다가 L군은 통증이 심해지면 어쩌나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다. L군의 어머니는 울고 있었고 L 군은 자신의 걱정을 이야기하며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동행했던 성직자가 L군을 안고 기도해주자 잠시 후 L군은 잠이 들었고 숨 소리도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에 L군이 소천(召天)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밤늦게 빈소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평 소에 조그만 일에도 눈물을 보이곤 하던 L군의 어머니가 전혀 울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의아해 하면서 L군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를 묻자 뜻밖의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호스피스에서 방문한 다음에 잠을 잘 잤는데 다음날 아침부터 환자가 자꾸 무엇이 보인다며 하늘을 쳐다보면서 웃고 놀라워하더라고 했다. 전혀 아프다는 소리가 없었으며 호흡곤란도 별로 없었는데 계속해서 하늘을 쳐다보며『베드로가 보인다』고 하고『그 옆에 빛나 는 분은 누구시냐』고 묻기에 엄마는『무엇이 보이냐, 엄마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하자 나중에는 L군이 『큰일났다. 우리 엄마는? 나는 천국 가는데 우리 엄마는 지옥 가겠다』고 하면서 엉엉 울더라는 것이었다.

    당황한 엄마가 어찌할 수가 없어서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아이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아 저거 말이니? 나도 이제 보인다』라고 하 자 환자가 너무 좋아하면서 자기가 보고 있는 하늘의 모습을 엄마도 보고 있는 줄 알고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하더라고 하였다. 그후 저녁 무렵에 L군이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엄마, 저거 보았지요? 나 먼저 갈 테니 나중에 오세요』하며 숨을 거두었다는 말을 하면서『아마 우리 아이는 꼭 천국에 갔을 거예요. 확신이 들어요』라고 했다.

    얼른 들으면 이 현상이 이상한 일같이 들리지만 사실 죽음에 임박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보는 일은 흔하게 일어나곤 한다. 장갑을 끼었다 벗으려면 손이 빠져 나오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우리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갈 때는 대개 2~3 일 또는 수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때 잠깐잠깐씩 양쪽 세계를 다 보게 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가시기 2~3일 전에 이런 현 상을 경험하지만 더러는 그보다 훨씬 일찍부터 이런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 밤마다 검은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승천하실 무렵에 침상 머리와 발쪽에 흰옷을 입은 빛나는 사람이 와 있다고 했던 49세의 폐암(肺癌) 말기 환자 K씨의 경우가 그랬다. 이분은 호스피스에 의뢰될 당시에 밤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해서 도무지 잠을 자지 못하 겠다고 했었다.

    K씨는 진단받았을 당시 1년간 항암제로 치료하여 완치되었다가 재발된 사례로 골전이(骨轉移)가 있었다. 재발되었다는 진단을 받은 환 자는 병원 진료실에서 각목을 휘두르며 화풀이를 하는 바람에 병원 진료를 마비시키기도 했다. 의료진들은 말기 상태인데다 소란을 계 속 피우는 환자를 다룰 수 없어서 호스피스에 의뢰한 경우였다.

    1차 방문시 그의 아내는 지쳐 있었으며 아이들은 겁에 질려 있는 상태였다. 환자는 심한 기침과 가래, 통증뿐 아니라 불면증(不眠症)이 있어서 밤에도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K씨는 밤에 불을 끄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낮에 일하고 온 아내가 고단하여 잠시 졸면 발로 차서 깨우고 화를 내며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이 밥을 먹고 있으면 갑자기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다고 하였다.

    얼굴은 초췌하고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눈 밑이 그늘져 있었다. 통증 때문에, 혹은 기침 때문에 자지 못하는가 생각하여 잠잘 수 없는 이유를 질문하였더니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3주 전부터 밤이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내 이름을 부르며 「金○○, 나와!」 하고 부르기 때문에 겁이 나서 자지 못한다』고 하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세 사람인데 남자 같다면서 매일 밤 나타나서 같이 가 자고 한다는 것이다. K씨는 내가 방문한 첫번째 호스피스 환자였는데 잠자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이분의 대답은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 우리 호스피스 팀은 K씨의 상태가「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영적(靈的)인 고통」이라고 보았고 이 문제는 영적으로 접근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환자의 집 근처에 있는 성직자를 찾아가 이 문제를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마침 환자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한예 수교장로회 ○○교회」라고 간판이 붙은 자그마한 교회가 하나 있어서 담임목사를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다행히 그분이 쾌히 응 낙해 주시고 즉시 환자를 방문하여 상담해 주셨다.

    몇 번의 상담을 통해 K씨는 더 이상 밤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호스피스 치료를 통해 기침이나 통증 등의 증상도 어느 정도 조절이 되자 그토록 못 자던 잠도 잘 잘 수 있게 되었다.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자 그동안 가족을 불편하 게 하였던 K씨의 짜증과 화내는 것이 누그러졌으며 무엇보다 가족들이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어 훨씬 편안해 하였다.

    환자의 가정을 방문하는 호스피스 팀과 신뢰관계가 형성되면서 환자와 부인은 자신들이 살아온 고단하였던 삶의 여정을 토로하기도 한 다. 이 환자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큰형님과 함께 살았는데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던 큰형수에 대해, 넓은 과수원이 있으면서도 그 한쪽에 자신이 묻힐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을 거절한 형님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치료하였던 의사에 대해 분노와 함께 적어도 그 들보다는 오래 살아야 한다는 오기(傲氣)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자신이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고 편안해 하자 더 오래 살게 될까봐 약을 감추고 주지 않았던 형수의 태도에 대해 흥분하며『내가 반드시 나아서 저들보다 더 오래 살아 저들을 다 죽이고야 말겠다고 마 음먹었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와 있다!”

    ▣ “아빠를 용서해 주겠니?”
    이러한 분노가 쌓여 병원에 와서 큰 소란을 피우며 행패를 부린 것이었다는데 호스피스 치료를 받는 동안, 그리고 성직자와의 영적(靈 的) 상담이 계속되는 동안 환자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환자의 표정이 편안해졌으며 형님과 형수를 용서하기로 하였다. 오랜만 에 방문한 큰형님과 형수에게 고아(孤兒)인 자신을 돌보아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하면서 그동안 화내었던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 다. 그 말을 들은 형님 역시 그동안 좀더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과수원에 묻힐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하였 다.

    또한 자신을 치료하였던 의사를 용서하기로 하였으며 임종이 가까워오자 자신이 그동안 치료했던 병원에 입원하여 최후를 마치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현행 의료전달 체계는 급성치료 중심이어서 3차 의료기관에 말기환자가 임종을 위하여 입원한다는 것이 용이하지가 않았으며 환자의 주치의(主治醫) 역시 그동안의 이런저런 일로 이 환자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병원에 다시 입원한다는 것 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호스피스 팀은 이러한 사실을 주치의에게 알리고 한 번 도움을 청해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호스피스에 의뢰된 이후의 환 자 상태와 경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주치의는 상당히 감동된 눈치로 그런 상태라면 자신도 그 환자를 용서하고 싶다고 하면서 입원 할 수 있도록 조처해 주는 것이었다. 입원 후 회진한 주치의에게 환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으며 주치의는 응낙 의 표시로 환자의 손을 굳게 잡았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밥 먹을 때마다 때리곤 했던 막내아들을 오라고 해서 『아빠가 널 때린 건 네가 미워서가 아니야. 그냥 네가 잘 먹는 모습을 보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아빠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랬던 거야. 그러나 널 때린 건 정말 미안하다. 아빠를 용서해 주겠니?』라며 용서를 청하였고 아들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에게도 그동안 못 자게 하고 화내고 심하게 굴었던 것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하 였으며 사랑한다고 말하였다.

    ▣ “흰옷을 입은 사람이 와 있다”
    그 다음날부터 환자는 임종과정(臨終過程)을 시작하였는데 소변량이 줄고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는 상태로 체인 스톡호흡(임종과정에 서의 독특한 호흡양상으로 잠깐 동안 숨을 안 쉬다가 몰아서 내쉬곤 하는 현상·注) 양상을 나타내었다. 그러면서 환자는 자꾸 무언가 를 쳐다보는 듯한 표정과 눈이 부신다는 듯한 몸짓을 하였는데『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하였더니『흰옷을 입은 사람이 와 있다』고 하였다. 어디에 있는지 묻자 환자의 침상머리 쪽과 발 쪽에 한 사람씩 있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인지를 물어보자 빛이 나고 어깨에 날 개가 있다고 하면서 얼굴 표정은 밝아 보였다.

    마지막 날 아침에는 K씨의 요청으로 방문한 성직자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나서 자신의 장례식은 어떻게 해 달라는 당부 를 한 다음 부인의 손을 잡고 아직 학생인 자녀들을 두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중에 만나자고 하였다.

    K씨의 자녀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네 명이 있었는데 부인이 보험설계사로 버는 수입으로는 벅찬 형편이었다. 호스 피스팀에서 高3인 큰딸이 취직을 하기 위한 기술을 배우도록 지원하기로 하였고, 이 사실을 K씨에게 알려서 안심하고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네 자녀와 부인, 형님과 형수, 주치의와 호스피스 팀이 지켜보는 가운데 밝게 빛나는 얼굴로 고요히 숨을 거두는 K씨를 보면서 둘러선 사람 모두가 큰 감동을 받았다.

    특별히 주치의였던 K의사는 이때 받은 감동으로 인해 그 이후로 우리 호스피스 팀에게 자신의 의과대학 수업시간에 와서 강의해 달라 고 요청하였으며 학생들에게는『육체(肉體)의 질병(疾病)만을 고치는 것이 의사가 아니다, 이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 서 우리들을 소개해 주었다.
    K씨나 H부인과 같은 경우는 성직자와의 상담이나 자신의 종교적 신념체계에 따라 내세(來世)가 있음을 알고, 확신하고 있었던 경우였 으며 L군의 경우 내세를 미리 봄으로써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가족까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더욱 확신하게 된 경우였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에 또다른 세계가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에게만 이런 현상이 경험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떻게 경험 될까?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필자가 만났던 환자들 중 일부는 이런 의문에 대해서도 답을 해주었다.

    B씨(男)는 55세의 말기위암(末期胃癌)환자였다. 전혀 아픈 곳이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 았고 그런 상태가 한 달 이상 계속되기에 병원에 가보았더니 여러 가지 검사를 한 끝에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하였다.

    인간다운 삶의 마지막 방식이란?

    ▣ “어머니가 데리러 왔다”
    수술을 하기로 하였으나 막상 열어본 결과 주변의 림프 결절에까지 전이(轉移)되어 있어서 그대로 도로 닫은 경우였다. 그후 항암(抗 癌)치료를 두 차례 하였으나 별 반응이 없어서 퇴원 후 가정 호스피스에 가입한 경우였다. 이분은 통증이 심해서 호스피스에 가입한 초기에는 통증조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B씨는 조용한 성품이었으며 방문시 부인과 함께 있으 면 이야기는 주로 부인이 다 하는 편이었으나 부인이 외출하고 없을 때는 수줍은 듯 조금씩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특별한 종교가 없었던 B씨는 유교(儒敎)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사람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늘 우울한 표정으로 미 간에 주름을 짓고 있기에 무슨 걱정이 있으시냐고 물어보았더니 한숨을 푸욱 쉬면서『희망이 없잖아요』라고 했다. 나을 수 있다는 희 망이 없어서 우울하고 마음이 답답하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자신은『어떻게 하든지 살고 싶다. 무슨 방법이 없겠는가. 나와 같은 경우 를 많이 보았을 텐데 얼마나 살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이런 질문은 대개 환자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본인의 생각은 어떤지 되물어 보았다. B씨는 『정말이지 죽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그러나 몸이 점점 쇠약해지니 이젠 못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겁이 난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며 살피는 듯한 눈망울로 필자의 눈을 쳐다보고 더 이야기해도 좋겠는지를 묻고 있었다.

    계속 이야기하라는 사인을 주자『죽음이란 먹지도 마시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인데, 죽으면 모든 것이 정지하고 끝나는 것인데 죽 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면서 자신이『이 세상에 끼쳐 놓은 것은 자식 하나밖에 없다』고 하였다. B씨에게는 딸이 둘, 아들이 하 나 있었는데 아들만 자식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두 눈 가득히 고인 눈물이 마침내 떨어지고야 마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도 안타깝고 답답하였다. 그런 B씨가 어느 날은 평소와 조금 달라 보여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B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았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꿈인가 생각하였는데 가만히 보니 옆에 와 계시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너 이틀 후에 나 만나러 오게 될 거야」라고 말씀하 셨다는 것이었다. 가기 싫지만 어머니가 두 번이나 그렇게 말씀하셨으므로 가야 하는 걸 안다고 하면서 한숨을 푸욱 쉰 후『어쩔 수 없지요』하며 눈을 감아버린다.

    그리고 B씨는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 운명하였다. B씨와 같이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여 죽고 싶지는 않지만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현실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1988년 3월부터 1989년 2월까지 우리가 방문하였던 환자 1백명을 대상으로 기록을 살펴본 결과 그 비율은 22.6%였는데 다른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좀더 높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 “인간다운 삶의 마지막 방식이란?”
    미국인(美國人)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던 정신의학자 퀴블러 로스는 임종(臨終)환자의 마지막 심리단계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 정하는「수용(受容)」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에게서 나타난 상기(上記)의 정서는 결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어쩔 수 없 는 일이기에 할 수 없이「포기(抛棄)」하는 것으로서 수용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한국에서 말기환자에게 병황(病況)을 사실대로 통고해 주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의사가 머뭇거리면서도 사실대로 말해주는 미국과 달 리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의사가 가족에게 말하고, 가족은 고심하다가 어렵게 환자에게 알려주거나 혹은 말해 줄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경우도 있다. 더러는 환자가 충격을 받을까 봐 또는 알지 못하는 채로 가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위암을 위염(胃炎)이나 위궤양(胃 潰瘍)이라고 속이거나 간암을 간농양(肝膿瘍)이라는 정도로 얼버무린 채 애매한 태도로 환자를 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인간이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게 과연 인간다운 일일까? 의사의 예측을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신만은 모른 채 「 왜 이렇게 빨리 못 일어나는 거야?」하다가 끝내 일어날 수 없게 되어서야 희미하게 눈치채게 되는 이런 방식이 과연 인간다운 삶의 마지막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어느 유명한 혈액종양(血液腫瘍) 전문 내과의사 한 분이 암환자들을 치료하고 연구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아, 나도 암에 걸려서 한 3개월만 투병하다가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조금 쉬면서 내 삶도 정리하고 떠날 수가 있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이 평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그만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운명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은 때가 이르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안다. 환자들은 자기 몸의 상태가 나빠지면「혹시?」하면서 의심하는 마음이 들게 되고, 임종단계에 이르게 되면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게 된다.

    B씨 외에 다른 환자들도 임종과정이 시작되면「이미 돌아가신 동네 어른이 와 계신다」고 하거나「오래 전에 돌아가신 친지가 와 있다 」고 하는 등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환자에게는 실재(實在)하는 어떤 대상(對象)이나 존재를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기 삶의 종착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건강하고 힘이 넘치는 동안에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언젠가 한 번은 죽게 되어 있고 이것은 인간이라 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우리 호스피스 대상자들은 호스피스에 가입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생(生)의 본질(本質)에 대해 질문하고 그 답을 찾고자 한다.

    말기환자들은 처음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신체적 증상들을 호소한다. 그리고 너무 아플까 봐 미리 걱정을 하기도 한다. 이는 건강한 자 원봉사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호스피스 자원봉사자가 되기 전에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 하면 대개는 『통증(痛症)이 심할까 봐 걱정이 된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평소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병이 들어 아프다가 죽는 것은 피했으면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마음인 것 같다. 그래서 호스피스 간호를 받고 통 증 없이 말기(末期) 상태를 보내게 되는 우리 환자들은 이런 면에서 무척 다행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말기환자들이 갖는 일곱 가지 질문

    ▣ 말기(末期)환자들이 갖는 일곱 가지 질문들
    그런데 호스피스 서비스를 통해 통증을 비롯한 증상들이 조절되고 나면 점차 먹지 못하고 기력이 쇠해지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많은 질문들을 하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죽음은 어떻게 오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은 후에는 정말 來世가 있는가?」
    「차가운 땅 속에 묻혀서 숨도 못 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神은 정말로 있는가?」
    그리고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말하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한다.

    이들에게는 부귀영화(富貴榮華)보다도 이런 것들이 당면한 더욱 큰 문제이고 두려움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게 되면 자신의 지나간 삶을 어린 시절부터 파노라마처럼 회상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때로는 시간, 공간 그리고 인간(人間)에 대 한 혼돈이 와서 지금 있는 곳이 예전 어린 시절에 살았던 그 집인 줄 알고 자신이 지금 어린아이인 것으로 착각하여 말하기도 한다. 이때 가족들은「환자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환자에게는 영화필름이 돌아가듯 지난 시간들이 회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회상이 드라마틱하게 일어나는 환자도 있다. Y씨는 3개의 회사를 경영해 온 60세의 남자로 간암말기(肝癌末期) 진단을 받았다. 친구가 의사로 있는 S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입원하였다.

    친구인 M의사의 생각으로는 이분이 평소 사리분별이 정확했고 또 경 영하던 회사도 정리하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본인에게 현재의 건강상태를 설명해주고 교과서에 써 있는 바 대로라면 잔 여수명(殘餘壽命)이 약3개월 정도 남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잠시 후부터 이 환자의 상태가 이상해지더니 온몸이 굳어서 움직이지를 못하고 말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유를 알 수 없게 된 M의사는 혹시 환자가 자신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정신과 의사에게 의뢰하였는데도 별 효과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호스피스에 의뢰한 경우였다.

    빨리 좀 와 달라는 전화를 받고 병실에 올라가 보니 정말 환자는 침대에 똑바로 누워 무릎을 약간 세운 채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 무서운 것이라도 보고 있는 듯 공포에 질린 얼굴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 다. 그래서 환자에게 다가가 얼굴을 쳐다보면서 『무엇이 그렇게 무서우세요?』 하고 질문하였는데 Y씨는 덜덜 떨면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지…옥…에…갈…까…봐…서…』라고 대답하였다. 『그럼 지옥에 안 가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하자 반가운 듯 고개 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간단하게 지옥에 가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자 Y씨는 그 자리에서 그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Y씨가 갑자기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내 손을 꽈악 쥐길래 다시 한 번 쳐다보니 온 몸이 굳어 있던 것이 다 풀 려 있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온 몸이 굳었다가 다시 풀릴 수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Y씨가 의자를 가리키며 좀 앉으라고 하더니 설명을 해주었다. M의 사의 말을 듣고 난 후 갑자기 지나온 자신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는데 「나는 이제 죽으면 어떻게 될까?」하고 생각해 보았 더니 「나는 아무 잘한 것도 없으니 죽으면 꼼짝없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지옥의 공포가 몰려 와 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 안 가는 방법을 선택하고 나니 그만 안도감으로 온 몸이 자기도 모르게 풀리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한 번 감사하다고 하였다.

    ▣ 두려워지면 화를 낸다
    Y씨의 경우는「지옥에 대한 공포감으로 인한 영적(靈的)위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의료인(醫療人)들도 잘 대면( 對面)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병동(病棟)에 입원한 환자가 응급벨(Call Bell)을 누를 때 의사나 간호사가 어 떻게 반응하는지를 조사한 결과를 한 예로 들 수 있다. 조사 결과 일반환자가 벨을 누르면 즉시 달려가는 반면에 말기환자가 누르면 인터폰을 들고 무슨 일인지 질문한 다음 두세 가지 처치를 모아서 한꺼번에 들어가 환자의 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빨리빨리 하고 나온 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그 이유는「두려움」때문이라고 하였다. 의료인(醫療人)들도 죽음에 대해서는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말기환 자가 죽음과 관련된 화두(話頭)를 꺼낼까 봐 두려운 마음이 있어서라고 응답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필자와 함께 일했던 자원봉사자 중에 그런 고백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40대의 가정주부였는데 친구 중 한 사람이 대 장암(大腸癌) 말기로 입원을 하였다. 병 문안차 방문한 그녀에게 환자는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당시 잔여수명(殘餘壽命)이 3개월 정도 될 것이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나, 호스피스에 가입하는 것은 반대하였고 대신 호스피스 교육을 마치고 자원봉사자로 막 활동을 시작하려고 하는 이분의 정기적인 방문을 원하였다고 한다. 이 봉사자는 직감적 으로 그 친구가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관해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그 상대로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은 자신을 선택하였다는 것 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친구가 생명을 다할 때까지 더 이상 방문하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방문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녀 자신도 그런 화제(話題)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고 울면서 이야기하였 다.

    그분뿐만이 아니었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 중에는 기분 나쁘게 왜 죽는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화를 내는 교육 생도 있었다. 호스피스 교육과정에는 죽음과 관련된 워크숍이 들어 있다. 호스피스에 참여하는 인력은 자신이 먼저 죽음에 대한 느낌 과 의미를 성찰해 보지 않으면 말기환자를 대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므로 이 워크숍은 호스피스 교육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미리 유서(遺書)를 써보는 시간도 있고 소(小)그룹으로 나뉘어서 죽음에 대한 각자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시간 도 있는데 갑자기 그룹 인도자(「튜터」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얼굴이 벌개져서 필자에게로 왔다.

    자신이 인도하는 그룹원 중 한 사람이『나는 호스피스 교육을 받으러 왔는데 기분 나쁘게 왜 죽는 이야기를 하느냐』면서 몹시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50대의 여행사 사장으로 직원들과 함께 단체로 좋은 일 좀 해보겠다고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을 받 으러 왔는데 자신의 내면(內面)에서 죽음에 대한 강한 거부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를 내고 피하면 그뿐인 주제일까? 외면하면 자기 자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화두(話頭)일까? 애써 외면하려고 하 면 할수록, 화를 내면 낼수록 어쩌면 보다 큰 두려움이 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이란 무엇인가?

    ▣ 남은 시간도 신념(信念)에 따라 달라
    반면 내세(來世)가 없으며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환우(患友)들 중에는,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지못해 떠나는 사람 들이 많았다. 이런 이들 중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 놓은 것을 자신의 사후(死後)에 누군가가 대신 사용하며 잘 먹고 잘 살 것을 생 각하니 가슴이 꽉 막혀서 실제 질환(疾患)의 진행상태보다 빠른 속도로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궁암(子宮癌) 말기였던 A부인은 집 안에 연못과 정자가 있는 크고 호화스러운 집에서 사는 부잣집 마나님이었다. 특실에 입원해 있 다가 퇴원하면서 가정 호스피스에 가입하였다. A부인 역시 내세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분으로 이 땅에서의 삶이 전 부라고 믿고 살아 온 분이었다. 그래서 의사가 더 이상 병을 고치기 어렵다고 하자 삶을 연장하기 위해 좋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보고자 하였다.

    호스피스의 목적은「인간(人間)이 자연스러운 자기 수명(壽命)을 다할 수 있도록, 또 그때까지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전인적(全人的) 으로 돕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저것을 억지로 하기보다 신체적, 정서적(情緖的), 영적(靈的), 사회적(社會的)으로 환자와 가족에게 가장 편안하고 도움이 되는, 그러면서도 환자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상자의 신념체계(信念體系 )에 따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을 보아 왔다.

    A부인은 호스피스에 가입하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 두 달만 치료하면 낫게 된다는 속칭「도사」의 말을 믿고 온 몸에 밀가루 칠을 하고 지름 2∼3cm 정도의 쑥뜸을 등과 팔, 다리 등에 여러 군데 뜨는 일을 매일 하였다.
    호스피스에서 방문하였을 때 도사가 치료(?)중인 경우도 있었는데 끝난 후 들어가 보면 A부인은 기진한 상태로 엎드려 있고 몸의 여 기저기에 있는 쑥뜸 자리는 분화구처럼 움푹 패인 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하다가는 패혈증(敗血症)에라도 걸릴 것 같아 보였다. 그런 일이 한 달쯤 계속된 후 보다 못하여『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A부인이 고개를 옆으로 젓는 것이었다.『그럼 왜 그렇게 매일 하고 있느냐』고 묻자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 낫게 해주겠다고 장담을 하니 믿어보는 것인데 이젠 힘이 들어서 이것도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은『죽고 싶지 않다, 죽는 것이 무섭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눈을 감는가, 빛이 없는 깜깜한 세상에 어떻 게 가겠나』고 하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쑥뜸 자리에 염증과 통증이 생겨서 호스피스에서 치료를 해 주었는데 그런 다음부터 A부인은 그 도사를 오지 못하게 하고 대신 S교회의 담임 성직자를 청했다. 그 이유는 이분이 병을 잘 낫게 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와서 자신의 병이 낫도록 기도해 줄 것을 기대하며 중간에 사람을 넣어 청(請)을 드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렵게 모셔온 그분은 A부인의 기대와는 달 리 병을 낫게 해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신에 영원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내세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종교적 믿음을 가질 것을 권유하였다는데 이에 실망한 A부인은 몹시 낙심한 모습이었다.

    초조하고 불안해 하던 그녀는『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허깨비 같은 게 보여요. 무서워요』하더니 악액질(惡液質:cachexia=오랫동 안 먹지 못해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註) 상태에서 허공에 손을 저으며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두었다.

    ▣ 죽음은 위엄(威嚴)을 가지고 만나야 할 삶의 종착지
    필자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글이 잘 풀리지를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마침 집 근처의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던「패치아담스 」라는 영화를 아이들과 함께 본 일이 있다. 사실 그날은 몹시 머리가 아파서 그냥 머리를 식히려고 갔던 것인데 전혀 기대 밖으로 너 무나 큰 감명을 받아 극장 안 어두운 곳에서 수첩에 메모해 놨다가 집에 가자마자 논문의 서론 부분을 줄줄 써내려갈 수 있었 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 패치아담스는「죽음은 적(敵)이 아니라 위엄(威嚴)을 가지고 맞이해야 할 인간 삶의 종착지」라고 하였다. 의사가 질병을 치료하다가 더 이상 치료(완치)할 수 없을 때 실패했다고 느끼는데, 병을 치료하면 이길지 질지 모르지만 사람을 치료하면 언 제나 이긴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을 치료하기 위해서 의사소통능력을 키우고 인간애(人間愛)를 길러야 한다고 외치면서 「죽음은 인 간이 위엄(威嚴:dignity)을 가지고 맞이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루 일과를 끝낸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오듯이 「죽음은 자연스런 인간 삶의 종착지이기에 그것과 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것은 사실 늘 호스피스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호스피스의 철학(哲學)은「죽음이란 인간 삶의 정상적인 과정 중 하나(a normal process of life)」라고 본다. 그러므로 생의 마지막 시간 동안 비록 완치는 안되더라도 최선을 다해 증상을 조절하고 삶의 질을 높이 며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한 채 죽음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개인적인 관심과 배려를 최대한 제공한다. 인간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 지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에 도움이 되도록 의료인뿐 아니라 성직자도 한 팀을 이루어 활동한다.

    그런 이유로 현대적 의학 기술로도 완치하지 못하는 질환의 말기에 있는 사람들이 호스피스 치료를 받으면서 내면(內面)의 상처가 치 유되고 인간 실존(實存)의 의미를 찾게 되어 편안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호스피스 철학(哲學) 중 하나는「生의 마지막 과정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서, 원하는 사람과 함께 희망하는 방식으로 살다가 원하는 장소에서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기 질환이라고 모든 사람이 호스피스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희망하는 사람에 한해서 환자와 가족의 동의하에 입원시키는 것이다. 또한 生의 마지막 시기에 지나간 생애(生涯)를 돌이켜 보면서 삶을 정리하고「안녕」이라고 말하고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는 해도 환자가 원하지 않으면 억지로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게 된 환우(患友)들 중에서 내세(來世)가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마지막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퀴블러 로스가「수용(受容)」이라고 명명하였던 정서(情緖)가 우리가 돌보았던 한국인 호스피스 대상자 중 10% 정도에서도 나타났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하였던 K씨와 L군이 그런 경우였고 Y씨 역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Y씨는 굳었던 온몸 이 풀린 다음날 부인에게 자신의 통장과 도장, 비밀번호 등과 함께 자신의 재산 상태를 알려주었으며 조용히 있고 싶다고 하여 다른 친구가 원장으로 있는 개인 병원으로 병실을 옮겼다. 일주일 후 방문하였을 때는 처음보다 안정되어 보였으며 통증은 잘 조절되고 있 었으나 복수(腹水)가 약간 차 있었다. 정기적으로 성직자와 상담을 하고 있었으며 환자가 편안해 하자 부인도 안정이 된다고 하였다. 1시간 정도로 방문을 마치려 하자『다음에 한 번만 더 와 주세요』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회사의 중역들을 오라고 해서 회사 경 영에 대한 지침과 권한 이양 및 정리를 하였다고 한다. 1주일 후 세번째로 방문하였을 때 Y씨는『이제 그만, 됐어요. 감사합니다』라 고 했다.

    사실 Y씨의 진행정도로 보아 아직 시간이 조금 더 있다고 생각했는데 Y씨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그래서『이제 시간이 없다는 뜻인가요?』하고 물어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혹시 알 수 없어서 부인에게『일 주일 뒤에 방문할 예정인데 그동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Y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오라고 해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부인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를 청하여서 자신이 떠난 후에도 부인을 위하여 가끔씩 방문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며 부인에게는 먼저 갈 테니 나중에 만나자고 하고 장례식에 대한 내용도 미리 원하는 방식을 이야기한 후『 빛이 보인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전화를 받고 장례식에 참석한 필자에게 Y씨의 부인은『지옥(地獄)에 안 가는 방법을 알려 주어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 고 하였다』면서 고맙다고 하였다.

    J부인 역시 우리에게 많은 감명과 가슴 아픔을 주었던 경우였다. J부인은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에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고 두 아들을 낳아 행복하게 살아왔다. 유방암(乳房癌) 말기로 암이 폐(肺)에 전이(轉移)된 상태였는데 의학적으로는 조금 더 치료해 보았으 면 하고 담당 의사가 아쉬워하였으나 본인이 더 이상 항암 치료는 하지 않고 호스피스 치료를 받겠다고 하였던 경우였다.

    ▣ 내세관(來世觀)이 있는 사람의 경우
    그녀는 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여 임종과정(臨終過程)을 시작할 무렵에 병원에 입원하 였다. 그녀는 자녀들에게「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알리고「인간이 원하는 대로가 아닌 삶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의 어떤 뜻이 있을 것이다」,「아빠와 장차 오실 새어머니 말씀 잘 듣고 훌륭하게 자라서 이 다음 에 다시 만나자」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J부인은 종교인이었는데 돌아가시기 3주 전부터는 몸이 점차 쇠약해져 가면서「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였다.
    곰곰히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으며 잠시 종교적 신념이 흔들리는 듯한 시간도 있었으나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간병인(看病人)이 신앙의 원리와 내세 에 대해 말해주자 확신 속에서 평안하게 소천하였다.
    남편에게는 자신의 무덤을 평토장(平土葬)해 줄 것과 결혼식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입혀서 관 속에 넣어 달라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천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 후에 편안한 모습으로 임종하였다고 한다.

    또한 폐전이(肺轉移)와 골전이(骨轉移)가 있었던 유방암 말기의 P부인의 경우도 특이한 감동을 준 사례였다. 그녀는 항암제 치료를 중 단한 대부분의 환자가 그러하듯이 그동안 빠졌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여 스포츠 머리 정도로 자라 있었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집에서 임종하기 위하여 퇴원하기로 결정하였으므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게 되었다. 집으로 가는 앰뷸런스 안에서 산소 마스크를 한 P부인은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므로 함께 동행하는 필자의 마음도 안타까웠다. 아직 청소년인 두 자녀를 두고 떠나야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옆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떨 구던 남편이 기어이 아내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으며『이 머리 자라면 파마해 주려고 했는데…』 하면서 울부짖고 말아서 함께 있던 필 자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집에 도착하여 방 한가운데 이불을 펴고 P부인을 눕혔다. 남편과 고등학생인 딸, 중학생인 아들이 울면서 P부인을 바라보고 있었고 급 하게 연락을 받고 달려 온 교우(敎友)들은 둘러앉아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찬송을 불러 주었다. 산소 마스크를 떼고 나니 체인 스톡 호흡을 하는 P부인

    • tracer 198.***.38.59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셨지요?

    • +++OTL 12.***.7.41

      예. 한국방문이랑 relocation때문에 뉴욕쪽으로 옮긴다고 잠시 소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