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자식, 추억, 게임…

  • #100077
    tracer 68.***.125.164 2493

    저는 국민학교 때부터 게임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5학년 때인가 아버지가 처음 8비트 애플 컴패터블(세운상가 제품)을 사주셔서 한 달에 한 번씩은 용감하게 디스켓 박스 들고 세운상가 돌면서 게임 카피해 오고(1개 당 500원.. 홀 펀치로 디스켓에 구멍 뚫어 양면으로 쓰고.. 기억나시죠?)
    집에 와서 보면 해온 것 중 반은 에러 나서 안되서 실망하고..
    그 당시 했던 게임들이 aztec, hard hat harry, zorro, conan, mask of the sun, ultima exodus, auto duel, rescue raiders, karateka… 사실 지금 영어 실력의 기반은 그 때 게임하면서 익힌 것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게임들(어드벤쳐나 rpg)은 사운드도 없고 그래픽도 조악했으므로 텍스트에 많이 의존했지요.
    중/고등학교, 대학교 초창기로 386, pentium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최신 pc게임들을 열심히 keep up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평소 제가 게임하는 것을 못하게 하지는 않으셨지만, 게임은 득될 것이 없는 시간낭비라고 항상 비꼬듯 말씀하셨죠. 저는 저 나름대로 반대 argument(별로 설득력 없는)로 항변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게임이 재미있는 것은 맞지만 엄청난 시간 낭비라는 점에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합니다.(게임 업계에 있으면서도 말이죠)

    그런데 어느 날(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밤 늦게까지 wing commander(아마도 3편)에 열중하고 있던 제 방에 아버지가 슬쩍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제 침대에 앉으셨습니다. 저는 하던 게임을 포즈하고 혼나는 것 아닌가.. 긴장했었는데, 아버지께서 불쑥 게임의 내용에 대해 물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게임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정말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라이브 액션으로 제작된 영화같은 컷 씬을 보여 드리고 3d space에서 전투하는 비행선들을 보여드리고..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면서 열심히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친구들과 메탈 밴드 한답시고 전기기타를 항상 웽웽거리곤 했었는데 게임 이야기 때와 마찬가지로 스윽 들어오신 아버지.. 저는 또 바로크 메탈과 잉위 맘스틴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해드리고,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면서 들어주시고 방을 나가셨습니다. 중간 중간에 질문을 만들어 던지시면서 제 이야기가 더 지속되도록 해주셨지요.

    사실 제 청소년기에 통털어 3-4번 일어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흥분된 기분과 아버지와의 chemistry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어디 놀이동산 놀러간 기억은 안나도 그 기억들은 너무나 따뜻하게 간직하고 있네요. 생각해보면 최고의 추억인 것 같습니다. 어디 special한 곳도 아니고, 제 방에서, 단 30분동안 일어난 일인데 말이죠.

    아래 크리스마스 선물 댓글 중에 roundone님께서 아이들의 게임 스토리에 관심을 가지고 동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과, 아들과 함께 망원경을 만들러 다니시는 어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위의 추억이 다시 한 번 떠올랐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식과 같은 눈높이가 되어서 그들의 관심거리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 같습니다.(사실 이 “진지하게”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문화에 조소를 보내거나 우리 때의 문화가 더 좋았다고 경쟁적인 논쟁으로 가기가 쉽지요.)

    아래 선물/게임기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든 생각에 주절거려 봅니다.
    참, 그리고 지금와서 결혼하고 생각해보니, 그 때 아버지가 제 방에 들어오신 것은 어머니가 push해서가 아닌가..(여보, 애들이랑 대화 좀 해요.)하는 강한 의심을 가져 봅니다.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그 추억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dsasllj 76.***.175.157

      저는 국민학교 저학년때, 동생과 방에서 밤에 선잠이 들어있는대 아버님이 들어오셔서 저하고 동생 머리를 한번씩 쓰다듬어주시고는 옆에 있는 피아노로 한 손가락만 가지고 아리랑을 치시더군요. 그때 아버님이 참 힘들게 일 하실때였는대 그 슬픈 아리랑 을 듣자니 괜히 눈물이 나더이다…
      막연히 불쌍한 우리아버지, 고생하는 우리아버지.. 이런생각에 참 슬펐던 기억이…
      이상한게 제가 아들이라서 그런가.. 집에서 살림만 하시던 어머니.. 정말 자식 키우느라 고생많이 하시고 새벽마다 학교가는 자식들 밥하시느라 평생 힘드셨는대… 어째 어머니 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저는 더 큰거 같습니다.
      다른 아들분들도 이러신지요? 원래 아버지는 아들이, 어머니는 딸들이 이해해 준다던대.. 정말 맞는 말인지, 저만 그런건지 궁금합니다.

      참.. 저는 대학 졸업반때 wing commander 1을 했습니다. 정말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게임이었죠. 그 후도 게임을 참 좋아했지만, 이제는 체력이 딸려서도 못하겠네요. ㅎㅎ

    • NetBeans 76.***.161.146

      잘 읽었습니다. ^^

    • GH 66.***.217.132

      tracer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다보디 저도 아버지 생각에 잠시 눈물이~

    • 올림피아 76.***.167.74

      좋은 글은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쓴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글을 접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Voice 65.***.195.171

      어린 두 아들을 키우면서 문득 문득 나의 아버지도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하는 순간이 벅차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더군요. 더욱이나 첫째 둘째놈 하는 짓이 저와 제 동생하던 행동하고 비슷한 것을 느낄때면 마음 속은 냉온탕을 넘나들게 되더라구요.

      언젠가 읽은 Wisdom of all fathers라는 책도 떠올리게 되는 내용의 글입니다. 우리는 어떤 아빠로 기억될까… 님의 아버님 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준 아빠로 기억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SD.Seoul 66.***.118.78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 albany 74.***.205.237

      아버지

      아버지란! ……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입니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
      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입니다.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봅니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입니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가장 좋은 선생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그럴 듯한 교훈을 새기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 남 모르는 미안한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합니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인상은,
      4세때–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때–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때–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때-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때-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때-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때-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때-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때-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때-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조언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합니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입니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웁니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됩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갑니다.

    • done that 72.***.252.120

      글 감사합니다. 집에 전화를 하고 싶어서—.

    • roundone 68.***.71.82

      저는 살면서 너무 힘이 들때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아버지 인것 같읍니다. 아버지 이시라면 이런경우 어떻게 하셨을까? 그냥 곁에 만이라도 계셨으면… 그 그리움은 이제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체, 훗날 똑같은 그리움을 내 아이에게 가슴속에 넌지시 남겨주고 나또한 떠나가겠지요.

      Tracer 님의 좋은 생각,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울러 주위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할 수 없는 많은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원한으로 가슴을 꽉 쥐고 사시는 분들과 나는 얼마나 함께 아파해 주었는지, 숙연해 지네요.

      어쩌면 자연이 모두의 아버지 이고, 온우주가 또한 아빠가 아닐런지 차분히 생각해보며, 세상의 모든 아버지 들을 이시간 그려봅니다.

    • 24.***.80.194

      좋은 글 고맙습니다. Tim Burton의 Big Fish라는 영화가 보고 싶어지네요…

    • 일요일 76.***.155.201

      부모자식 관계에 있어서 아들,딸이 얼마나 다를까요? 기본적인 마음은 거기서 거기일거라 생각됩니다.

      결혼해서 남녀둘이서만 살때는 잘 몰랐는데,아이들 낳고 키우다 보니 유독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당신들의 삶을 인내하고 희생하며 사셨을게 이제야 가슴으로 느껴지니 말이죠.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결혼 초기엔 시부모님께 서운한 마음도 크고 오해할 일이 참 많았는데…시간이 지나다보니 남편을 키우셨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쨘해지더라구요.

      게다가 이제는 남편의 모습에서 나의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고맙기도 하고 마음 한편이 아리기도 하고.

      말 나온김에 부모님들께 전화해야겠어요.

    • bread 75.***.152.182

      :) 따뜻한 글이네요.

      게임계에 있었군요. 저도 살짝 발을 담그다가 지금은 다른일을 하고 있지요.

      아버지가 되고, 부모가 되고, 30대, 40대가 되면서, 부모님의 심정을 이제야 정말 피부로 알게 되는 것 같아요. ^^;

      늘 행복하시기를~

    • ISP 208.***.196.57

      트레이서님하고 저하고 비슷한 연배라는 생각이 마구마구 듭니다. ㅎㅎㅎ

    • Samuel 68.***.195.94

      저는 아버님과의 추억은 직간접적으로 싸웠던 일밖에 생각이 안납니다. 그나마 미국에서 살면서 전화상으로 통화만하니 부딪힐 일들은 별로 없고 좀더 완만해진 관계를 유지할수 있어서 좋긴하지만 나이는 자꾸 드시고 술담배를 하시는 아버님이 많이 걱정이 되곤 합니다. 미국에서 지겹게 하는 허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모님이랑은 제 인생을 통틀어서 아마 손에 꼽을정도밖에 없을겁니다.

      연말쯤만 되면 왜 이렇게 고국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드는지… tracer님의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