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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국민학교 때부터 게임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5학년 때인가 아버지가 처음 8비트 애플 컴패터블(세운상가 제품)을 사주셔서 한 달에 한 번씩은 용감하게 디스켓 박스 들고 세운상가 돌면서 게임 카피해 오고(1개 당 500원.. 홀 펀치로 디스켓에 구멍 뚫어 양면으로 쓰고.. 기억나시죠?)
집에 와서 보면 해온 것 중 반은 에러 나서 안되서 실망하고..
그 당시 했던 게임들이 aztec, hard hat harry, zorro, conan, mask of the sun, ultima exodus, auto duel, rescue raiders, karateka… 사실 지금 영어 실력의 기반은 그 때 게임하면서 익힌 것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게임들(어드벤쳐나 rpg)은 사운드도 없고 그래픽도 조악했으므로 텍스트에 많이 의존했지요.
중/고등학교, 대학교 초창기로 386, pentium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최신 pc게임들을 열심히 keep up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평소 제가 게임하는 것을 못하게 하지는 않으셨지만, 게임은 득될 것이 없는 시간낭비라고 항상 비꼬듯 말씀하셨죠. 저는 저 나름대로 반대 argument(별로 설득력 없는)로 항변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게임이 재미있는 것은 맞지만 엄청난 시간 낭비라는 점에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합니다.(게임 업계에 있으면서도 말이죠)그런데 어느 날(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밤 늦게까지 wing commander(아마도 3편)에 열중하고 있던 제 방에 아버지가 슬쩍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제 침대에 앉으셨습니다. 저는 하던 게임을 포즈하고 혼나는 것 아닌가.. 긴장했었는데, 아버지께서 불쑥 게임의 내용에 대해 물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게임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정말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라이브 액션으로 제작된 영화같은 컷 씬을 보여 드리고 3d space에서 전투하는 비행선들을 보여드리고..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면서 열심히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그리고 당시 친구들과 메탈 밴드 한답시고 전기기타를 항상 웽웽거리곤 했었는데 게임 이야기 때와 마찬가지로 스윽 들어오신 아버지.. 저는 또 바로크 메탈과 잉위 맘스틴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해드리고,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면서 들어주시고 방을 나가셨습니다. 중간 중간에 질문을 만들어 던지시면서 제 이야기가 더 지속되도록 해주셨지요.
사실 제 청소년기에 통털어 3-4번 일어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흥분된 기분과 아버지와의 chemistry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어디 놀이동산 놀러간 기억은 안나도 그 기억들은 너무나 따뜻하게 간직하고 있네요. 생각해보면 최고의 추억인 것 같습니다. 어디 special한 곳도 아니고, 제 방에서, 단 30분동안 일어난 일인데 말이죠.
아래 크리스마스 선물 댓글 중에 roundone님께서 아이들의 게임 스토리에 관심을 가지고 동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과, 아들과 함께 망원경을 만들러 다니시는 어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위의 추억이 다시 한 번 떠올랐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식과 같은 눈높이가 되어서 그들의 관심거리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 같습니다.(사실 이 “진지하게”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문화에 조소를 보내거나 우리 때의 문화가 더 좋았다고 경쟁적인 논쟁으로 가기가 쉽지요.)
아래 선물/게임기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든 생각에 주절거려 봅니다.
참, 그리고 지금와서 결혼하고 생각해보니, 그 때 아버지가 제 방에 들어오신 것은 어머니가 push해서가 아닌가..(여보, 애들이랑 대화 좀 해요.)하는 강한 의심을 가져 봅니다.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그 추억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